“RB2장애 많이 올라오더라고요. 904SMS는 괜찮아요.”
“639는?”
“RB 교체하니까 그 장애만 올라오던데요.”
“이달에 꼭 잡아야 해.”
"…"
“한 주의 마지막날이니까 많이 바쁠 겁니다. 준비 많이 하십시오. 저녁에 그룹 회식있으니까 참고하세요.”
지난 3일 오전 7시40분 서울 종로구 누하동의 엔에이치테크(NHT·Nautilus Hyosung Tech) 서부지역본부 사무실. 서서울그룹 서대문팀의 송윤석(36) 과장이 아침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마지막 ‘회식’ 얘기를 빼곤 숫자로 된 암호를 주고받는 것 같아 도통 알아듣기 힘들다. 이들은 은행의 단말기·현금자동입출금기(ATM·automatic teller machine)·현금인출기(CD·cash dispenser)를 책임지는 엔에이치테크 노동자들이다. <매일노동뉴스>가 이날 송 과장의 하루를 동행취재했다.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에러메시지’
은행에서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것이 ATM기다. 현금·수표 입·출금은 물론 계좌이체·통장정리까지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은행직원이 담당했던 업무의 상당부분을 기계들이 맡고 있다. 기계에 문제가 발생하면 기기 관리업체의 전산시스템에 에러 발생부위·발생시간·은행지점 등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된다. 이 정보는 관리업체 직원의 개인 휴대전화에 메시지로 전송된다. 각자 지참하고 있는 PDA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전 9시20분 송 과장의 휴대전화에 에러메시지가 떴다.
“망원2동 하나은행 52번 기계에서 9**** 에러가 발생했네요.”
카드부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이다.
“안녕하세요. 효성 직원입니다. 52번 카드부쪽에 장애가 발생했죠? 곧 이동하겠습니다.”
송 과장이 필요한 자재를 챙겨 오전 9시33분 사무실을 나섰다.
“명함에 얼굴도 새겨 주세요”
송 과장은 망원동·합정동·홍익대·연세대·성산동·상암동을 맡고 있다. 출발하기 직전에 송 과장이 PDA에 일정→고객방문, 은행지점, 출발 등을 입력했다. 이렇게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PDA에 입력해야 한다.
망원2동에 있는 하나은행으로 향하던 중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서대문 우체국 ATM기에 문제가 생겼다.
“지나가는 길이니까 먼저 처리하는 게 낫겠네요. 빨리 처리할 수 있는 장애인 것 같아요.”
서대문 우체국에 도착한 송 과장이 묵직해 보이는 검은색 가방을 꺼냈다. 들어 보니 어림잡아 10킬로그램은 되는 것 같다. 드라이버·펜치 등 각종 작업도구가 담겨 있다. 우체국에 들어서니 홍은아 대리가 반갑게 맞이한다. 홍 과장은 "2003년 우체국 신촌지점에서 봤는데 서대문지점에서 다시 만나 서로 낯이 익다"고 말했다.
“2003년에 제가 직접 설치한 건데 요즘 속을 썩이네요.”
ATM기에 카드가 들어가지 않았다. 송 과장이 이리저리 살펴본 지 5분이 됐을까. 카드가 다시 들어가기 시작했다. 접촉불량이었다. 수리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송 과장이 자신의 카드를 여러 차례 사용해 본다. 이상이 없다.
“또 같은 현상이 발생하면 휴대전화로 연락 주세요.”
송 과장이 명함을 건네자 홍 대리가 “명함에 얼굴 사진도 하나 넣으세요”라며 농담을 던진다. 송 과장은 홍 대리가 인정하는 ‘친절왕’이다. 기기 관리업체 직원이 AS작업을 하면 고객인 은행직원들이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기도 한다. 송 과장은 5번이나 ‘고객 칭찬상’을 받았다.
일반인 출입제한구역
다시 망원2동 하나은행으로 향했다. 하루에 적어도 10군데 이상을 돌아다니다 보니 주행거리가 만만치 않다. 2001년 구입한 차량의 주행거리는 15만1천775킬로미터. 다른 지역을 맡고 있는 팀 동료가 지원을 요청하는 날이면 하루 60~70킬로미터 거리를 달린다. “계속 차에 앉아 있다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이동하는 것을 반복하니까 허리가 부실해요.”
10시25분 하나은행에 도착했다. 주차공간이 비좁다. 주차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제한구역 출입기록에 서명을 하셔야 합니다.”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제한구역에 들어가려니 은행 직원들도 신경을 쓰는 눈치다. 송 과장이 기계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집게로 손톱만한 이물질을 끄집어낸다.
“이물질이 센서를 가려 나타난 단순장애입니다.”
가방에서 면봉과 공업용알코올을 꺼내 센서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가방에 없는 게 없다. 기계를 만진 송 과장의 손이 금세 까맣게 변했다. 이어 고객들이 이용하는 쪽으로 가서 작동상태를 확인했다.
“아까 서대문 우체국에선 잔고가 1천184원이었는데 이번엔 잔고가 많으시네요.”
“하하. 마이너스 통장입니다.”
하나은행에서 작업을 마친 송 과장이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웠다. 한 건씩 작업을 끝낼 때마다 담배를 문다.
“보통 하루에 한 갑 정도 피워요. 간혹 하루 종일 매달려 있어도 해결 안 되는 장애가 발생하면 줄담배를 핍니다.”
엔에이치테크 직원들은 영업·경영지원·자금·CS·인테리어사업·인테리어영업 등의 업무를 한다. 노조(위원장 김대환)는 한국노총 정보통신노련을 상급단체로 두고 있으며 전체 직원 300여명 가운데 250여명이 조합원이다. 김대환(44) 위원장은 최근 4선에 성공했다.
일하면서 인연도 맺고
오전 10시52분 국민은행 성산동지점에 도착해 전날 교체하지 못했던 화면부(모니터)를 교체했다. 화면에 검은줄이 생겼다. ATM기는 자동차처럼 모듈로 구성돼 있다. 현금·수표처리부, 카드부, 명세표·저널처리부, 통장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상이 생기면 각 부위 어디에 에러가 발생했는지 메시지가 뜬다. 에러코드만 책 한 권 분량이다. 송 과장이 작업을 끝내자 동료에게 지원요청이 들어왔다. 이화여대 본관 신한은행 ATM기에 이상이 생겼다. 출동해 기계를 살펴보니 누군가 지폐 사이에 영수증을 넣는 바람에 생긴 단순장애다.
때마침 대학 캠퍼스에는 진달래·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가기 싫어하는 곳은 병원 장례식장 근처예요. 곡소리가 들리니까 기분이 꺼림칙하죠.”
가고 싶은 곳은 대학 캠퍼스나 은행이다. 은행을 자주 출입하다 보니 직원과 은행 직원이 인연을 맺기도 한다. 서서울그룹 팀원 9명 중 3명이 은행직원과 결혼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먼저 찾아가는 서비스
엔에이치테크는 고객이 연락하기 전에 기계의 에러를 감지하고 ‘먼저 찾아가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송 과장은 이날 점심을 먹고 기계의 먼지를 털어 주는 송풍기를 들고 세브란스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로비 3층 우리은행지점에 있는 기계를 둘러보기 위해서다.
고객들이 ATM기 앞에서 업무를 보는 동안 NHT 직원들은 뒤편에 있는 ‘365 자동화실룸’에서 각종 작업을 한다. 송 과장이 송풍기를 틀고 먼지를 털어 내자 ‘윙’ 소리가 들린다. 작은 기기에서 검은 먼지가 뿜어져 나왔다.
“돈이 끌고 들어오는 먼지죠. 오작동의 주요 원인이 됩니다.”
밀폐된 자동화실룸에서 먼지 제거작업을 하던 송 과장의 얼굴에 연신 땀이 흘러내린다.
“여름엔 기계 문을 여는 순간 열기가 확 밀려와요. 찜질방이 따로 없죠.”
송 과장의 마음을 알았을까. 은행의 이승은 주임이 시원한 오렌지주스를 내왔다. 기계 상태를 주고받는 모습이 영락없이 절친한 친구같다.
“송 과장은 기계에 이상이 생기면 설명을 성의껏 잘해줘요. 급할 때는 저희가 직접 고치기도 하죠. 전화로 알려주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원격조종을 당하는 거죠. 하하.”
이날 마지막 장애는 신한은행 서교중앙지점에서 발생했다. 은행에 찾아가니 직원도 장애가 발생한 걸 모르고 있었다. 이 지점에는 타사와 효성의 ATM기를 반반씩 사용하고 있다.
“어제는 회식 때문에 일찍 가야 하는데 A사 직원이 기기장애가 발생했다고 왔더라고요. 효성(NHT)은 직접 기사님이 오시는데 A사는 경비업체에서 왔어요. 회식도 못 가고 제가 기계에 걸린 지폐를 다 뺐다니까요.”
일이 바빠 주말에 데이트할 틈도 없다는 한 직원이 송 과장에게 넋두리를 풀어놓았다. 기계에 걸린 지폐를 모두 제거하고 송풍기로 먼지까지 제거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예 고맙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집에선 무뚝뚝한 남편, 그래서 고마운 아내
송 과장 휴대전화로 전달된 크고 작은 에러는 17건. 집에 있을 때 메시지가 오면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이런 에러메시지는 저녁 9시까지 휴대전화로 날아온다. 은행직원들을 만나는 동안 송 과장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 가면 말이 없어진다.
“밖에서는 계속 웃으면서 사람들을 대해야 하니까 집에 가서는 무뚝뚝해지더라고요. 하루 종일 기계만 보고 있으니까 감정이 메마르는 것 같기도 해요. 애꿎은 아내가 상처를 받을 때가 많아요.”
10년 전 캠퍼스 커플로 만난 아내는 송 과장의 일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고 한다. 주말에 근무할 때가 많아 연애시절에도 일하는 현장에서 틈틈이 연애를 하면서 일하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이날 회식자리로 이동하는 길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집에 일찍 들어오라는 전화였다.
“내일은 애들하고 동물원에 가기로 했어요. 오늘 회식도 하고 좀 피곤하겠지만 애들 배꼽에 바람 좀 넣어 줘야죠.”
<매일노동뉴스 4월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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