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차: 비정규직법 따라잡기 '천태만상'
2회차: 외주화 시장만 커진다
3회차: 비정규직 정규직화 사례
지난 8년 동안 경기도 소재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과학실험보조원으로 일해 온 임시영씨(32·여·가명)는 요즘 우울증 치료약을 먹고 있다. 임씨는 방학식이 있던 날 학교로부터 ‘다른 직장 알아보라’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는 도통 잠을 오지 않는다고 호소했다. 지난 2003년 채용 당시 ‘결혼도 했고 집도 가까워 오래 근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뽑았다’던 과학부장 선생님으로부터 ‘비정규직 2년 후엔 정규직을 시켜야하는데 학교에 예산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학교에서는 그동안 3명이 담당하던 교무보조와 사서보조, 과학실험보조업무를 하나로 통합하겠다는 방침이다. 따라서 1명만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고 나머지 2명은 모두 해고될 처지다. 임씨는 매달 통장에서 꼬박꼬박 빠져나가는 전세대출금만 해도 100만원인데 졸지에 실직자가 된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쏟는 심정이라고 털어놓았다.
오는 2월이면 새마을호 승무원으로 일한 지 2년 차가 되는 고윤진(29·여·가명)씨는 지난 11월30일 비정규법안 통과되기 불과 이틀 전 계약만료통지서를 받았다. 2년 전 계약직으로 입사할 당시만 해도 철도공사에서는 ‘계약직이라고 해도 일만 잘하면 정규직도 가능하다’고 호언장담했다. 그 말만 믿고 잘 나가던 은행 정규직 자리도 박차고 나왔다. 그런데 새마을호 승무업무를 ‘외주화’한다며 난데없이 KTX관광레저로 전적하라니…. 여기에 한술 더 떠 철도공사 여객본부장은 ‘정규직 시켜주겠다는데 뭐가 문제냐’며 오히려 큰소리다. 가뜩이나 울고 싶은 데 뺨까지 때리는 격이다.
일단 자르고 보자?
비정규법안이 시행도 되기 전에 곳곳에서 비정규직 무더기 해고 사태가 줄을 잇고 있다. 정부가 비정규직 문제해결에 모범을 보이겠다며 발표한 ‘공공부분 비정규직 종합대책’은 오히려 공공부문이 앞장서서 비정규직을 대량 해고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정규법안이 통과된 지 한 달도되기 전인 지난해 12월 22일 법원 행정처는 계약직 민간 경비원 40여명에 대해 재계약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해고했고, 철도공사는 KTX에 이어 113명에 이르는 새마을호 승무원들까지 계약해지하고 자회사로의 전적시켰다. 한국은행도 계약직 운전기사 5명에게 재계약 없이 용역으로 전환하겠다고 통보, 비정규법안 통과에 따른 첫 부당해고 구제소송의 당사자가 됐다.
심지어 노동부 산하기관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한국고용정보원은 지난 12월29일 종무식을 끝낸 뒤 45명의 비정규직 가운데 14명에 대해 재계약의사를 밝히지 않음으로서 해고했다. 서울대병원도 12월31일 부로 2년 미만 계약직 20명을 계약해지했다. 앞으로도 180여명이 추가로 해고될 가능성이 높다. 서울대병원은 지난해 단체협상 과정에서 2006년 8월31일 기준으로 2년 이상 비정규직을 240여명을 단계적으로 정규직화하기로 합의했으나, 비정규법안 통과 이후 계약만료 즉시 해고통보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민간부문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의 한 사립대병원에서 12월31일 9년 차 비정규직 4명을 해고했다. 또 다른 한 사립대병원에서도 비정규법안 시행을 대비한 ‘임시직 관리지침’을 마련하고 2년 이상 비정규직 2명에게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오는 7월부터 비정규법안이 시행돼도 차별시정 조항의 경우 공공부문과 300인 이상 사업장에 우선 적용된다. 때문에 대기업을 제외한 대다수의 민간기업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다. 하지만 한국비정규노동센터 김주환 기획국장은 “노조가 없거나 약한 유통업의 경우 소리·소문 없이 비정규직을 정리하고 있는 추세이며 제조업에서도 상당수 업체가 진성도급제(사내하청) 도입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식이 속속 보고되고 있다”고 밝혔다.
외주화가 대세인가
사실, 이 같은 사태는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윤성봉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은 “우리은행처럼 은행권을 중심으로 일부 대기업에서는 직군제나 직무급제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지만 대다수의 기업들은 비정규법이 통과되자마자 ‘일단 자르고 보자’는 식 해결책을 선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나마 민간부문의 경우 비정규법 시행령과 시행규칙 제정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공공부문의 경우 ‘공공부문 비정규 종합대책’과 2007년도 예산안이 맞물리면서 서둘러 비정규직 숫자 줄이기에 두 팔 걷고 나서고 있다.<상자기사 참조>
윤 연구원은 “공공부문의 경우 오는 5월까지 무기계약대상자를 확정해야 하는데, 올해 예산안을 보면 이에 대한 비용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며 “따라서 장기계약직을 해고하거나 아예 업무를 외주화하는 방법을 통해 손쉽게 비정규직의 규모를 줄이고 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비정규법이 오는 7월부터 시행될 경우 이 같은 공공부분의 행태는 민간부문으로까지 빠르게 확산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실제로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분석한 통계청 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에 따르면 이 같은 우려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간제 비정규직 소폭 감소했지만 파견과 용역노동자의 비중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8월 기준 전체 임금노동자 1천535만1천000명 가운데 비정규직 841만4천000명(54.8%), 정규직 657만4천000명(45.2%)으로 비정규직 비율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포인트 감소한 것으로 나타난다. 기간제고용 역시 233만6천000명(15.2%)으로 1.8%포인트 감소했다. 그러나 파견근로와 용역근로의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파견근로는 1만3천000명(11.0%포인트 증가), 용역근로는 6만8천000명(15.8%포인트 증가)이 늘었다. 특히 용역근로 노동자 수는 비정규 노동자 중 가장 큰 폭으로 증가해, 전체 노동자 중 파견·용역근로가 차지하는 비중은 0.4%포인트가 높아졌다.<표 참조>
또, 대한상의가 592개 기업체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도 이를 반증하고 있다. 기업체 10개 중 6개는 ‘비정규법 시행될 경우 일정 요건 갖추면 정규직 전환, 나머지는 계약해지 하겠다’고 답했으며, 비정규직 모두를 계약해지 하겠다는 응답도 5.1%나 나왔다. 특히 10개 중 2개 기업은 ‘비정규직 업무 자체를 아웃소싱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그래프 참조>
비정규직 전문 인사·노무컨설팅업체 등장
비정규법안이 통과되면서 바빠진 곳은 기업체뿐이 아니다. 인사·노무 컨설팅시장도 빠른 속도 활성화되고 있으며 특히 아웃소싱 전문업체는 제철 만난 양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노무법인을 운영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최근 들어 비정규직 컨설팅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며 “비정규법안으로 인사·노무 전문업체가 짭짤한 수익을 올릴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비정규직과 관련한 문의전화를 받다보면 기업체에서 ‘(비정규직을) 일단 잘라야 되냐’는 내용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며 “지금 기업체들은 사실상 혼돈상태에 빠져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번 비정규법안이 기업체 인사노무관리의 터닝포인트가 될 것은 확실하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인사노무 컨설팅업체는 아예 비정규직 부분을 특화하고 나서기도 했다. 경총 역시 비정규법 시행을 앞두고 일손이 부족할 지경이다. 경총이 오는 26일 개최 예정인 ‘비정규법 개정에 따른 비정규직 운용 실무과정’에는 1인당 20만원을 호가하는 가격에도 불구, 신청문의가 쇄도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경총은 이미 지난 16일 ‘비정규법률 및 인력관리 체크포인트’라는 실무지침서를 발간한 바 있다. ‘재판부에서 ‘기간의 정함이 형식에 불과하다’고 판단될 여지가 높을 경우 기간제 계약직 인원을 최대한 정리하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이 책의 내용은 최근 기업체들의 비정규법 대응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사용자측에 비해 노동계의 대응은 턱없이 더디다. 한국노총은 비정규직 대량해고 사태와 관련한 정책제안을 발표하고 부당해고(처우) 등에 관한 상담·신고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실태파악조차 여의치 않은 형편이다. 민주노총은 이와 관련한 논평을 발표한 것이 전부. 민주노총 역시 한국노총과 비슷한 형태의 비정규 상담센터를 운영한다는 계획은 세우고 있지만, 임원선거가 진행 중인 관계로 논의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민주노동당 역시 비정규법 개정안을 검토 중에 있지만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노동연구원 은수미 박사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종합대책 발표와 비정규법안 통과 직후부터 대규모 기간제 비정규직 계약해지나 아웃소싱 사태는 예견됐던 상황”이라며 “그럼에도 정부는 ‘할 만큼 했다’는 태도로 일관하며 뚜렷한 대책을 세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은 박사는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노동계의 대응”이라며 “대책을 촉구해야할 노동계가 모니터링 등 구체적인 현황파악조차 손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지금의 사태를 더욱 장기화시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시정과 상용직화의 내용을 담고 있는 비정규법안의 파장은 비정규직을 넘어 정규직의 임금체계와 직무체계까지 송두리째 흔들게 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비정규법이 시행도 되기 전에 계약해지와 아웃소싱 도입 등에 따른 비정규직 대규모 해고 징후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계는 본연의 임무에 보다 충실해질 필요가 있다. ‘두 눈 뜨고 당했다’는 말을 또 다시 되풀이할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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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노동뉴스 <2007년 1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