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전 '열혈학생'이던 시절, 집안 제사가 끝나면 으레 정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필자였다. 전두환, 이순자에 대해 온갖 독설로 시작되는 필자의 정치선동(?)은 "너는 공부는 안 하고 웬 정치에만 그렇게 관심이 많으냐"는 어른들의 지청구를 듣고서야 마무리되곤 했다.

조합원은 탈정치, 조합간부는 과잉정치

20년이 지난 오늘날, 그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요즘 제사를 마치면 정치 이야기를 꺼내는 건 집안 어른들이시다. 물론 노무현 정권에 대한 성토 일색이다. 서로 앞다투어 한마디씩 들은 비난과 험담을 옮기시는데. 그 내용이란 차마 글로 옮기기에 너무도 민망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북한에 너무 퍼줘서 남한 경제가 어려워졌다’, ‘좌파정권이 성장보다 분배를 우선해서 경제가 붕괴되고 있다’ 등등.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노무현 정권의 잘못은 잘못이고 울컥 울화가 치밀기도 한다. 그런 심경을 알고 계신지 집안 어른들이 필자를 챙기신다. “그래도 우리 집안에서는 정치하면 네가 전문가인데, 너는 노무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냐?” 그럴 때 필자의 난감한 답변. "저 정치에 관심 없어요."

여기서 끝이 아니다. 20여년전, 필자가 전두환 독재에 대한 정치적 반대를 끌어내기 위해 학생운동에 대한 온갖 집안 어른들의 비판을 수용했듯 지금은 어른들이 그렇게 하신다. 20여년전, 집안 어른들이 ‘학생들이 화염병 던지는 행동은 너무 과격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라도 하시면 필자는 매우 겸손한 태도로 ‘학생운동도 잘못하는 게 많이 있지만 그래도 나라가 잘 되려면 전두환이를 하루 빨리 끌어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대화로 전두환에 대한 정치적 반대를 이끌었다.

그러한 정치적 역할도 이제는 집안 어른들의 몫이 되었다. ‘그래도 한나라당은 너무나 부패한 집단 아니냐’며 필자가 한마디 하면 집안 어른들이 거꾸로 ‘맞다, 한나라당 문제다, 하지만 나라가 잘 되려면 노무현이가 하루 빨리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니냐’며 노무현에 대한 정치적 반대를 유도한다. 20년만에 필자는 집안 어른들과의 관계에서 반전두환 전선의 정치적 견인 주체에서 반노무현 전선의 견인 대상으로 전락한 셈이다.

이것이 지난 20년 필자가 주변에서 가장 가깝게 느끼는 정치의 변화다. 5·31 지방선거가 끝난 지 한달이 넘었다. 도대체 지금의 결과가 정치적으로 노동운동의 패배인가 승리인가! 우리는 그런 정치적 평가조차 못하고 있는 반면, 현실에서 대중의 정치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압승의 결과는 지역주의의 부활도, 박근혜 피습에 따른 어부지리도 아니다. 열린우리당의 어설픈 개혁에 실망한 정치의식이 부족한 대중의 잘못된 선택이 가져온 수구정당의 어이없는 승리도 아니다. 수구세력들이 신자유주의 양극화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들의 민심 이반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반노무현정권 정치투쟁을 전개한 데 따른 승리이다.

신자유주의 양극화 속에서 대중은, 특히 빈곤에 시달리는 하층 대중의 생활상의 좌절과 분노는 높아져 왔다. 그리고 그러한 불만이 기존의 신자유주의 하에서 완화되거나 체제 내로 수렴되지 못함에 따라 계속 정치적 방향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대중의 정치화를 초래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정치화된 대중을 결집하며 일관된 정치투쟁을 전개한 것은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수구세력이었다. 동네 노인정에서 탄핵 지지 서명운동에 이어 행정수도 반대 서명운동이 전개될 정도로 대중의 정치화는 진전되고 있었지만 노동운동을 비롯한 진보진영은 이러한 대중의 정치화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대중의 생활상의 불만이 정치화로 진전되는 동안 진보진영은 정치를 의회감시운동, 사법감시운동 등의 권력감시와 이른바 실현가능한 정책 대안이라는 이름의 의회주의적 정책경쟁으로, 그리고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노동운동가들의 공직 진출 정도로 퇴보시켜 왔다. 그래서 대중의 정치적 결집은 표 모으기와 당 후원금 확보의 문제로 치환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외형적으로는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져 의회 진출이라는 성과를 내는 데 성공하고 민주노총과 산하 연맹들이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참여가 보장되었지만, 노동운동이 대중을 정치적으로 동원해내는 능력은 꾸준히 감소해 왔다. 대중의 탈정치화를 동반한 노동의 정치세력화로 귀결된 것이다.

당신의 정치 방안을 떳떳하게 호소하라!

한편, 이러한 대중과의 관계에서 탈정치화와 정반대로 활동가 사이에서는 과잉정치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입만 열면 좌파니 우파니 세력을 나누는 데 활동가들은 익숙해져 있다. 당의 별 시시껄렁한 이야기조차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심각한 정치 이슈로 비약되기 일쑤다. 이러한 대중적 탈정치화와 활동가 수준의 과잉정치가 빚어낸 운동질서가 바로 정파 갈등과 '쪽수'를 통한 의사결정이다.

대중의 탈정치화로 대중적 정치 토론이 실종되면 될수록 활동가들의 과잉정치화에 따른 정파 간 패권 다툼은 심화되었고, 그 귀결은 사안을 가릴 것 없이 표결에 의한 의사결정, 즉 '쪽수' 대결이었다. 노동운동의 의사결정이 정치토론이 아닌 '쪽수' 대결로 결정되는 상황에서 대중의 정치화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지금 노동운동이 해야 할 것은 제대로 된 정치논쟁을 전개하는 것이다. 즉 지금의 신자유주의 양극화가 초래하는 위기에 대한 정치논쟁을 대중적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노동운동 내 일각에서 20년 민주화운동의 귀결이 파시즘의 복귀로 나타날 우려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이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자유주의 개혁세력의 무능함이 파시즘을 부를 가능성은 매우 현실적 우려를 자아낼 만하며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임에 틀림없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문제의식을 강조하는 동지들은 은연중 김근태씨를 포함한 개혁진보연합 세력을 결집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러한 고민들을 ‘개량주의’라는 한마디로 일축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동지들은 떳떳하게 공개적으로 이러한 정치프로그램을 대중에게 제출할 수 있으면 좋겠다.

또한 이러한 노선에 반대하는 동지들도 더이상 뒷골목에서 ‘운동 내 특정세력이 김근태랑 손을 잡을 것이며 그렇게 될 경우 당이 쪼개질 것’이라는 문제제기만 할 게 아니라 지금의 위기에 대한 운동진영의 정치 프로그램을 제출해야 한다. 87년 투쟁으로 형성된 정치질서가 개헌논의와 정계개편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드는 현실에서 노동운동이 취해야 할 정치전술에 대한 구체적 대안을 제출했으면 한다.

신자유주의로 촉발된 위기는 대중의 정치화를 초래하고 있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정세적 긴박감과 무관한 일반화된 정치세력화 경로는 아무런 대중적 호소력이 없다. 그저 열심히 지역에서 발로 뛰자는 주장은 사실상 진보정치를 포기하자는 주장에 다름아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치열하게 진행될 개헌 논쟁과 정계개편은 단지 부르주아 내부의 권력 다툼에 불과한 게 아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로 인해 심화되는 대중의 분노의 정치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 정치 위기에 대한 진보진영의 해답이 대중적으로 제출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대중적 정치토의의 부활에 기초한 대중의 정치화 과정일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승리야말로 진보진영의 정치 위기에 대한 무능력의 귀결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금 진보진영에 최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이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위기에 대한 정치적 타개책을 대중적으로 논쟁하는 것이다. 이 정치 위기를 노동자 대중의 변혁적 정치세력화의 기회로 만들려고 한다면, 이 위기를 남 탓을 통해 자기 정파의 정당화의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우리 모두 각자가 준비한 정치위기의 해법을 대중적으로 제출하자.

각자의 준비된 해법이 대중적 논쟁으로 발전 할 때 노동운동 위기의 대안은 성큼 우리 앞에 다가설지 모를 일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