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요즘 도시사람들은 이런 말 들으면 피식 웃는다. 입꼬리를 만 채로. 불과 몇년 전만 해도 동정의 기운이나마 있었는데 요즘엔 숫제 경멸의 기색을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세상이 변했다고 한다. 지금, 사회주의는 '옳으냐 그르냐'에서 '좋으냐 싫으냐'로 자의반 타의반 이동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원내의석 제4위의 대중정당인 민주노동당은 자신의 강령에서 "인류사에 면면히 이어져 온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해방공동체를 구현할 것"이라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사회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명사인가, 형용사인가. 명사로 발전하는 형용사인가, 형용사로 전락하는 명사인가. 그러나 이 당은 지난 총선에서 5백만표(정당명부비례대표선거)를 얻었다. 지금, 사회주의는 거세된 희망이나 박제된 욕망 따위 지식인의 희노애락으로는 측정할 수 없게 됐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유선희씨는 민주노동당의 최고위원으로 활동했다. 지난해 최고위원직을 사퇴한 선희씨는 '당의 통합'과 광범위한 민중연대를 강조하는 이른바 '자민통' 그룹이지만,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했다. 김광수씨는 이번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선거에 출마했다. 비록 낙선했지만 광수씨는 '사회주의 정당화'를 주장했다.

'사회주의자'로서 스스로를 담금질하며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이 두 사람이 이번주 <우리이웃>의 주인공이다. 선희씨와 광수씨는 노선이 매우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공통점이 꽤 많다.


선배 따라 '반미 통일'…"각인효과는 아니다"

선희씨는 1984년 서울대 역사교육과에 입학했다. 어릴 적 꿈이 선생님이었다. 호기심 가득찬 눈으로 대학 교정을 지나던 신입생 선희씨는 한 장의 대자보를 읽었다. ‘노동자와 농민이 군부독재의 착취로 비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마르크스의 좌우명도 있지만 선희씨는 의심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선희씨는 같은 과 선배에게 질문을 해댔다. “저런 현실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거죠?”

선희씨는 한 학년 위였던 선배를 따라 ‘단재사상연구회’에 가입했다. 단재사상연구회는 지하써클(공개적으로는 고전연구회)로 <강철서신>으로 유명한 김영환씨가 주요 구성원이었고, 서울대에서는 유명한 'AI(반제국주의)그룹'이었다.

운동권 써클 가입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대학사회에서 운동권이 주류였기 때문에 과 선배들 따라 함께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는 선희씨. 운동권이 주류여서가 아니라 정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닐까. 겸손한 선희씨.

1~2학년 시절 선희씨는 단재사상연구회의 두 선배로부터 체계적으로 학습을 받았다. <자본주의 구조와 경제발전>, <포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청년 맑스> 등 그때만 하더라도 한국어로 된 사회과학서적이 거의 없어 일본어로 된 책을 봤다. 물론 학습만 한 게 아니었다. 교내시위와 가두기습시위. 선희씨는 20여명의 학생들과 스크럼을 짜서 “미제 축출”을 외쳤다. 교정 반대편에서는 한 무리의 학생들이 다른 구호를 외치기도. 가두 기습시위는 선배로부터 '택'(전술 tactic의 운동권식 준말)을 받아 길거리에서 기습적으로 5분 정도 구호를 외치다 흩어지는 방식이었다.

1984년 여름부터 서울대 학생운동권 내에서는 '깃발-반깃발', 'MT-MC', 'C-N-P' 등 똑똑한 서울대학생들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고 현란한 논쟁이 전개됐다. 저학년이었던 선희씨는 선배들에게 귀동냥 하는 정도. 선희씨는 1985년 'NLPDR' 노선에 따라 조직된 구국학생연맹에 가입을 했다. 구국학생연맹은 단재사상연구회가 주도적으로 만든 대중투쟁조직으로, 1986년 대학가의 반미투쟁을 주도했다.

선희씨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혹시 처음 발디딘 써클 때문에, 그 각인효과로 계속 자주파의 길을 걸어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지금 생각해 봐도 자주 민주 통일은 역시나 중요한 화두죠. 반미와 통일을 중심에 놓고 통일전선으로 현장에서 주요한 과제를 잘 수행해 왔다고 생각해요. 이론은 없고 실천만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대중 속에서 활동을 잘 해 왔어요.” 원칙적인 선희씨.

광주의 원흉은 미국…"나는 반미주의자였다"

광수씨는 1984년 서울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했지만 선희씨처럼 신선한 신입생은 아니었다. 광수씨는 두해 전인 1982년 서강대 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그만두고 시험을 다시 쳐서 서울대에 들어왔다. 공대를 선택한 이유는 부모님의 바램이셨다. 광수씨의 아버님은 구로동에서 금형공장을 운영하셨다. 대학물을 먹은 '늙은 신입생' 광수씨는 서울대 입학하기 전 이미 의식화가 돼 있었다. “제 운동의 시발은 광주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울분으로 가득차 있던 광수씨는 우연찮게 노래패 <메아리>에 가입했다. 세미나에서 <자본주의 구조와 경제발전>이라는 책을 놓고 공부를 하는데 그게 재미있어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선희씨랑 공부한 그 책이다. 메아리 공연무대에도 섰다. 합창할 때 비록 립씽크를 하는 조건이었지만.

1학년2학기가 되자 <메아리>의 세미나는 광수씨의 관심 밖으로 벗어나게 됐다. “시시해졌다”는 광수씨. 같이 공과대학을 다니던 친구와 인문대 여학생 등 3~4명이 모여 헤겔연구회를 만들어 공부하다, 1985년 공대 지하써클에 가입했다. 특별히 이름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공대패밀리로 불렸다고. 공대 패밀리는 변화된 상황(1983년 학원자율화 등 유화조치)에서 학원자율화투쟁을 통해 정치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MC그룹(당시 서울대 학생운동의 주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공대패밀리의 활동은 역시 세미나와 시위. 5~6명이 모여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부터 일본의 좌익 교과서 <강좌철학>, <세계철학사> 등을 공부했다. 광수씨는 '독학'으로 러시아, 이탈리아, 독일 혁명사도 읽었다.

이때 학내에서 진행됐던 이론투쟁에 광수씨도 선희씨처럼 참여하지는 않았다. “이론은 더 급진적이면 환영했죠. 공대는 '사회대 식민지'였는데, 그저 몸으로 때웠죠, 뭐. 시위 나오라면 나가고.”

광수씨가 당시를 얘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재미”다. 세상 무슨 일이든지 재미가 있어야 하는 게 맞기는 하지만 당시는 재미로 운동하던 시절은 아니었다. 일련의 유화 조치로 학내에서 시위가 가능해졌지만 그래도 군사독재정권 시절이었다. “대학생이라면 당연히 김지하의 글을 읽고 우국충정으로 운동도 하고 술도 마셔야 된다고 생각했죠.” 편하게 얘기하는 광수씨지만 가슴으로는 칼을 갈았다. “저는 정말 전두환 노태우는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목을 따고 각을 떠야 된다고 … 그때는 반미주의자였어요.”

2번의 옥살이…"몸이 불타는 고통만 할까"

1986년 선희씨는 구국학생연맹의 지도급으로 법대와 사범대 지역위원회 책임자로 활동하다, 9월에 수배가 됐다. 선희씨의 학습지도선배가 경찰에 체포돼 구국학생연맹 조직이 드러나게 됐던 것이다.

선희씨는 수배된 뒤 얼마 있지 않아 학교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형사에게 잡혔다. 경찰서에 가서 큰 고통을 당하지는 않았다. 이미 경찰들이 구국학생연맹에 대해 다 파악하고 있던 터라 더 캐내기 위해 족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았다고. 조사 과정에서 경찰에게 인격적 모독 좀 받고, 목의 급소 몇대 맞은 정도라나. 늠름한 선희씨. 재판에서 1년6개월 실형을 받고 의정부교도소, 원주교도소에서 징역살이를 했다.

구속으로 선희씨의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선희씨의 부모님은 ‘서울대 나와 탄탄대로를 걸을 줄 알았는데’ 하시며 탄식을 할 계제가 못 됐다. 아무리 남녀가 동등한 세상이라지만 아들놈도 아니고 딸자식이 감옥에 가다니. 게다가 선희씨가 구속됐던 때는 부천서 성 고문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두려움과 걱정으로 우시던 부모님들은 구속이 되어서도 법정에서 구호를 외치다 끌려 나가는 선희씨를 보고는 안도와 포기하는 심정으로 옥바라지를 해주셨다.

선희씨는 옥살이도 투쟁으로 생각하고는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 작은 것이라도 문제를 삼아 집단적으로 시위를 하며 보냈다. 이러다 징벌방에 끌려가서 손발이 꽁꽁 묶인 채로 3~4일 동안 갇혀 있기도 했다. “밥도 그 상태로 먹어야 됐는데.” 선희씨는 호들갑 떨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지만 치욕은 떠올리기 싫은가 보다. 말꼬리를 흐린다.

1987년 6월항쟁 덕분에 그해 7월 양심수로 석방이 된 선희씨는 학생운동을 하기 위해 복학을 할 생각이었다. 선희씨는 6월항쟁을 어떻게 평가할까? “적어도 고문은 없어지고 시위의 자유는 생겼으니까, 그 주체로서 자부심을 느끼죠.” 이러던 중 12월 대통령 선거 시기에 구로구청에 부정투표함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선희씨는 구로구청 농성에 참여했다. 1,000여명 농성자 전원이 연행될 때 선희씨도 연행돼 다시 구속, 실형 1년을 받고 옥살이를 또 했다.

두번째 옥살이는 힘들었다. 감옥에는 양심수들이 거의 없었다. 혼자였다. 어디서든 문제가 있는 곳에서는 투쟁하는 게 운동이라고 배웠고, 또 배운 만큼 실천하고자 했던 선희씨는 홀로 옥중투쟁을 했다. 교도소 내 처우개선 문제로 일주일 동안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다.

민주화됐다는 세상에서, 민주화를 이끌어낸 주체로서 자부심을 느꼈다는 선희씨는 정작 88년 한해를 고스란히 감옥에서 보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세판단 이전에 무척 힘들었던 선희씨는 이재호, 김세진 두 열사를 떠 올렸다. 선희씨는 그 현장에 있었다. 1986년 4월28일 서울 신림동 사거리에서 벌어진 전방입소반대시위 시작 전 사라졌던 두 선배는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를 외치며 불덩이가 되어 나타났다. ‘어렵고 힘들다 한들 그것이 몸에 불이 붙는 고통보다 더 할까.” 선희씨는 캄캄한 징벌방에서 두손 두발이 꽁꽁 묶인 채 자신의 눈앞에 분신한 두 선배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1988년 12월 석방이 된 선희씨는 복학과 현장취업을 두고 망설이다, 현장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2년간의 단절이 크게 다가왔어요.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은 학교에 없었던 데다 굳이 학생운동을 할 필요가 있냐는 생각에서 현장으로 가기로 했죠.”


선을 찾아 좌충우돌…그분은 오시지 않았다

1986년 3학년이 된 광수씨는 공대패밀리 활동을 하면서 전기공학과 학회장을 맡았다. 학생회를 통해 학생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1학년 빨간물(?) 들이기에 나선 광수씨는 날마다 1학년들의 첫 수업시간 10분 전에 들어가 학회와 학내, 조국의 상황을 설명하는 일종의 정치교육을 했다.

순진한 신입생들은 광수씨의 선전과 선동에 우국충정으로 불타올랐고, 광수씨는 신입생 78명 가운데 72명을 학회에 가입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신이 난 광수씨는 학회 내 여러 개의 학습팀을 만들어 세미나를 지도하고 시위에 끌고 다니다 밤이면 후배들 술 사 먹이며 다독였다.

본인의 표현대로, 광수씨는 “공대에서는 상당히 잘 나가는 대중활동가”였지만 좀더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이 궁리 저 궁리를 대고 있었다. 광수씨는 선희씨가 활동했던 구국학생연맹과도 약간의 인연이 있다. 구국학생연맹의 한 단위에서 하는 모임에 처음으로 가서 세미나를 했다. 교재는 <…에 대하여>. 광수씨는 첫 세미나임에도 불구하고 “이건 관념론”이라고 비판을 했단다. 다음 모임에 갔더니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얼마 있지 않아 건국대 사건(전국의 29개 대학, 2000명의 대학생이 '전국 반외세반독점 애국학생투쟁연합'의 결성식을 건국대에서 진행하려다 1,200여명이 구속된 사건)이 터졌고, 이 사건으로 동료 후배들이 대거 구속됐다. 이때 광수씨는 공대 축제준비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터라 건국대에서 치르려던 결성식에 가지 못했는데, 함께 일할 동료들이 사라진 학교에서 버티기 힘들어진 광수씨는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잘못했죠. 후배들이 힘들어했는데….”

6개월 단기사병으로 동사무소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 6월항쟁이 일어났다. “방위병들 꼬셔 집회에는 참가했지만 심드렁했어요. 오히려 7월 노동자대투쟁 때 신문 보고 막 울었어요.” ‘독재타도’와 ‘호헌철폐’가 도탄에 빠진 조국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광수씨.

“저도 현장으로 갈 생각을 하고 CA(제헌의회그룹)선을 타려는데 다수파가 정리(?)가 되면서 현장팀이 낙동강 오리알이 된 거예요.” 약속장소에 나갔더니 오신다고 하던 ‘그분’이 오시지 않았다. 현장으로 가려던 광수씨는 1987년 2학기 복학을 했다. 힘든 시기 학교를 떠났다는 마음에 반성하며 학교를 다녔다. “낮은 곳에서 활동하자고 마음먹고 현수막만 들고 다니고 뒤치다꺼리만 했죠.”

이러던 광수씨에게 대중활동 공간에서 손짓을 했다. 총학생회 기획차장으로 발탁이 됐다. 광수씨는 방위 시절 과외를 해서 벌어 놓은 돈으로 인쇄기를 사들고는 총학생회로 들어갔다. 이 인쇄기 하나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발휘했다. 87년 대선에서 서울대 총학생회는 후보단일화로 입장을 정했지만 백기완 후보 선거운동을 하던 일군의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있었을 터. 이들은 인쇄소 공장장 광수씨를 찾아 와 유인물을 찍어 갔단다. 광수씨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당시 저는 후보 단일화가 맞다고 생각했어요.”

총학생회 활동으로 2번의 학사경고를 받고 제적이 된 광수씨는 현장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아니 그런데 복학을 할 수 있는 길이 생겨 버렸다. 노태우 대통령의 당선 축하 선물이었다. 예기치 않은 선물로 광수씨의 후배들이 대리 출석, 대리 시험을 하느라 고생을 했다. 한 학기만 버티면 졸업을 할 수 있는데 후배들 고생 시키는 것쯤이야. 졸업에 관한 모든 것을 후배들에게 맡겨놓고 1988년 가을 광수씨는 현장으로 가기 위해 노동자의 도시 '마창'(마산 창원)으로 향했다.

현장활동 차곡차곡…결실 맺지 못하고 또다시 감옥으로

1988년 선희씨는 구로공단으로 들어갔다. 우선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방직공장과 신발공장에 다니다 컴퓨터보드를 만드는 갑을전자에 입사했다. 갑을전자에는 이미 노동조합 민주화를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10여명이 만든 현장 모임에 선희씨는 자연스럽게 결합했다.

갑을전자 노민추 활동을 하는 노동자들과 풍물도 배우고 야유회도 다니고, 잔업거부투쟁 조직 등 현장활동을 하면서 1년6개월 가량 다녔을 무렵 위장취업자로 발각이 됐다. 동생의 주민등록증으로 취업을 했던 선희씨는 공문서 위조로 1년 실형을 받고 다시 옥살이를 하게 됐다. 감방살이가 지겨울 법도 한데 지칠 줄 모르는 선희씨는 사노맹 사건으로 구속된 김진주씨가 영등포교도소로 들어오자 정치적 입장이 다름에도 구호를 외치고 통방을 시도하다 징벌방에 끌려가 또 고초를 겪었다.

1년을 꼬박 채우고 선희씨가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는 1991년 5월이었고, 9월에는 소련이 붕괴됐다. 민주화 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활동을 하던 많은 이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선희씨는 이 현상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시 활동을 해야 되는데 어디에서 활동을 해야 될까. 이 생각만 했죠. 1년 감옥에서 지내면서 활동에 대한 갈증이 너무 많았어요.” 위장취업자로 해고가 된 선희씨가 노동현장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노동현장에 못 들어가니까 노동단체에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91년 11월 한국노동교육협회를 찾았다. 선배 한분이 소개를 해주셨지만 한국노동교육협회와 특별한 인연은 없었다. 제발로 찾아가서 일하게 해 달라고 했단다.

“저는 외곬수인 것 같아요. 세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문제있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내가 참여할 것인가 이것만 결정하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구분되지 않을 때가 있다. 또 문제라고 생각했던 게 문제가 아닌 경우도 있다. “사람이 주인 되는 세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잖아요. 정의감으로 한번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역사는 변화 발전한다’는 진리(?)와 믿음(?) 하나로 선희씨는 역사 앞에 자기 한몸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역사가 변화 발전하는 조짐을 찾기를 바란다. 머리가 빠른 자, 제깐에 아무리 열심히 찾아도 그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다. 어리석어 떠나지 못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떠나지 않는 자의 대다수는 보았기 때문에 안 떠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먼저 보기 전에 먼저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희씨는 무엇을 보여주었을까. 20대 때 세번의 옥살이로 세상과 운동으로부터 고립됐던 선희씨. 이 질문은 뒤로 미뤘다.

오락부장에서 ‘계급해방’ 전선으로

전노협의 선봉, 마창노련의 도시. 창원으로 간 광수씨는 1989년 1월 대림카뷰레타에 입사했다(대림자동차에 합병된 회사로 당시 조합원은 200여명).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금형공장에서 프레스, 밀링, 선반을 어려서부터 배우고 바쁠 때는 공장에서 일도 했던 광수씨에게 공장 취업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기술이 좋아 의심을 받을 염려도 없었고, 노동조합(한국노총 소속)도 이미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광수씨는 몸 사리지 않고 활동을 할 수가 있었다. 노동조합 교육차장을 맡아 조합간부들과 다른 노조 지원투쟁을 나가기도 하고, 당시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마산창원 거리를 해방구로 만들었던 마창노련 ‘정방대’(정당방위대) 대원으로도 활약했다.

좋은 시절은 얼마 가지 않았다. 광수씨는 대림카뷰레타 현장에서 89년 5월 임단투 투쟁을 하며 파업까지 이끌어냈는데 '3일천하'로 무너지고 말았다. 조합원들이 파업 3일만에 흔들렸다. 반성을 하자면 “너무 빨리 터뜨린 것 같다”고.

파업이 터지자 회사에서는 광수씨의 뒷조사를 했고 당연히 해고를 시켰다. 현장에 들어간 지 넉달만에 노조간부를 하며 파업까지 이끌어냈다, 해고까지. 눈깜짝할 만한 사이에 일어난 일이지만 광수씨가 현장을 떠날 때는 아줌마 노동자들이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오락부장이 없어지몬 무슨 재미로 회사를 다니노?”

다른 현장으로 재취업을 하려는데 잘 되지 않아 골머리를 썩고 있던 광수씨에게 번쩍 든 생각. ‘이왕 창원으로 왔는데 사무직으로 취업을 해 보면 어떨까?’ 1990년 기아중공업에 입사를 했다. 수습사원으로 교육받고 발령받기 직전 그만 두어야 했다. 들어가서 보니 기아중공업이 방위산업체 아닌가. 신원조회에 걸릴 것은 뻔한 사실. 어느날 높은 분들이 광수씨를 대하는 태도가 싸늘하게 변했다는 느낌을 받은 순간 뛰쳐나왔다.

갈 곳이 없어진 광수씨. 1990년 경노협(경남노동자협회)으로 들어갔다. 경노협은 87년 7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성장한 마산창원지역의 선진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모임이었다. 여기에는 선전노동자뿐 아니라 전국에서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마산창원으로 온 학생 출신의 활동가들도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마창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면서 광수씨가 가진 정치적 경향성에 균열이 왔다. 광수씨는 비록 구국학생연맹으로 일종의 ‘따’를 당하기는 했지만 반미주의자였다. “미국 기업체였는데 노조가 만들어지고 싸움이 시작됐어요. 여성노동자들이 구사대에게 쇠파이프로 엄청 맞았어요. 지원투쟁 나간 우리들이 구사대를 잡아 패주려는데 한 친구가 '구사대도 한 민족'이라며 '때리지 말자'고 하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죠.”

‘한 민족이라도 계급이 다르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즈음 1990년 8월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인 성두현씨가 중심이 된 ‘계급해방’이라는 조직이 생겼다. 계급해방은 서울대 공대 인맥, 인천에서 문화활동하던 노래패 메아리 출신 일부들로 50여명의 조직원들로 구성됐다. 광수씨도 가담을 하게 됐다.

계급해방의 마창조직 책임자로서 광수씨는 1991년부터 마창지역의 몇몇 노조와 활동가들을 규합했다. “사회주의자의 현장 활동 핵심은 정치선동이다. 현장에서 정치신문을 만들자.” 광수씨와 현장 활동가들은 자료를 취합한 것이긴 하지만 직접 정치신문을 11개 사업장에 400부 정도를 뿌렸다. 당시는 정파가 만드는 정치신문들은 학생 출신 활동가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현장 노동자들은 수용을 하는 형편이었는데, 광수씨네 정치신문은 현장 활동가들이 직접 만들었다고 광수씨는 거듭 강조했다. 


선희씨의 고향은 전주다. 아버지는 전주제지 노동자셨다. 반장까지 하셨던 성실한 ‘근로자’셨다. 선희씨는 어머니가 두 분이시다. 선희씨 11살 때 어머니께서 암으로 돌아가셨다. 남은 아이들은 선희씨를 포함해 다섯이나 됐다.


홀로 되신 아버지께서 재혼을 하셔서 어머니 한 분이 더 생겼다. 새 어머니는 오래전에 입양한 딸과 함께 선희씨네로 오셨다.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아이를 하나 낳았다. 이리하여 선희씨네 형제는 2남5녀다.


새어머니의 구박도, 핏줄이 다른 형제들 간의 갈등은 없었다. 아버지와 새 어머니 사이에서 난 어린 아기를 귀엽다며 서로 업어 키우며 살았다.


그렇지만 아주 가끔씩 선희씨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새어머니의 정당한 꾸중에 반감을 가지기도 했다는데. 이후 선희씨는 새어머니의 옥바라지를 받으면서 반성을 많이 했단다. 노동자의 월급으로 아이들 7명을 키우는 어머니의 딱한 사정이나 7명의 아이들 뒤치닥꺼리에 한숨 돌릴 여가도 없었을 어머니를 이해하거나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아무리 어리지만 반감을 가졌다니.


새어머니는 감옥을 제집 드나들 듯 들락거리는 선희씨 옥바라지 하느라 고생을 꽤나 하셨다. 교도소는 왜 그렇게 멀리도 있고, 자주 바뀌는지. 원주로 목포로…. 그 어머니께서 2005년 11월 돌아가셨다. 2남5녀 선희씨네 형제들은 부둥켜안고 참 많이도 울었다.
1991년 광수씨가 마창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을 때, 광수씨의 어머님께서 보따리를 들고 홀로 창원으로 오셨다. 남편의 폭정(?)에 못 견뎌 “더이상은 같이 못 살겠다”고 선언을 하고 큰아들을 찾아오신 것이다.


광수씨의 집안을 살펴보자면, 광수씨의 아버님은 선반공, 어머님은 미싱사였다. 당시 두 분은 전주에 사셨는데 다니던 공장이 가까워 지나다니다 눈맞춤을 하게 됐고, 결혼을 하셨다. 잘 나가던 선반 기술자였던 광수씨 아버님은 서울로 이주해 자리를 잡았다. 광수씨가 12살 되던 때부터는 구로동에서 금형공장을 직접 운영하셨다. 중학교 다니던 광수씨가 학교 마치고 기계를 돌려야 했을 정도로 사업은 번창했다. 이렇게 번 돈으로 광수씨 아버님은 구로동에 땅과 집을 여러 채 사놓아 지금도 부자라는 얘기를 듣는다.


광수씨 아버님은 소비를 죄악으로 여기는 데다 맨손으로 집안을 일으켰다는 자부심이 강하셨다. 너무 강하신 나머지 집안에서는 군림하시는데, 이게 아내, 광수씨의 어머님에게는 너무나도 큰 고통이 된다. 이리하야 ‘계급해방’ 하겠다고 집 나온 광수씨와 남편으로부터 ‘여성해방’ 선언을 하시고 집 나온 엄마, 두 모자의 마산 단칸방 생활이 시작됐다. 생활이야 말 할 수 없이 곤궁했다. 어머님은 그래도 사장님 부인 사모님이셨는데.


낙천적이고 적극적이시던 어머님은 스스로 길을 개척하셨다. 평생 남편 뒷바라지만 하던 어머니에게 완벽한 자유의 시간이 생기게 되자 어머니는 근처 야학에 다니며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셨다. ‘가’ ‘갸’ ‘거’ ‘겨’ 한 자씩 배우던 어머니에게 천지개벽의 순간이 도래했다. ‘마산 어시장’을 읽고 버스를 탈 수도 있고. 혼자 은행에도 갈 수 있고….


아들을 기다리며 혼자 공부를 하시던 어머님은 광수씨가 돌아오면 곧잘 물어 보셨다. “얘, 이건 어떻게 쓰냐?” 늦은밤, 어머니와 아들은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한글 공부를 했다. 어머님은 가끔씩 아들에게 편지를 쓰셨다. 늘 부르는 아들 이름 광수를 연필로 또박또박 적어 “광수 보아라~~” 얼마나 기쁘셨을까.


하늘이 열리는 기쁨을 맛본 어머니는 공부를 더 하기를 원하셨다. 광수씨는 생활비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하던 고시학원에 어머니 얘기를 했다. 그 고시학원에서는 광수씨 어머님 같은 분들을 위해 무료로 강좌를 개설했고, 광수씨와 어머니는 손잡고 학원을 다니며 마산창원 시절을 보냈다.
<2월2일자로 후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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