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내가 못 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 온 몸이 불덩이가된 아들이 가쁜 숨으로 내 뱉았던 마지막 외마디는 가난에 쪼들려 하루하루 살기벅찼던, 세상에 `무지'했던 어머니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몸을 사른 아들 전태일 열사의 뒤를 이어 지난 30년 동안 이 땅의 소외받는 곳에서 노동운동과 민주운동에 앞장서온 `노동자의 어머니'이소선(71)씨. 그동안 민주화운동 보상법의 제정으로 불순세력으로 매도됐던 수 많은 사람들이 재조명될 정도로 세상이 많이 바뀌기도 했지만 여전히 수 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려지는 걸 보면 아직도 세상은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기도 한 것 같다는게 13일 전열사 30주기를 맞은 이씨의 생각이다.

그가 노동운동에 뛰어든 것은 근로조건개선과 노조결성 등 8개조항의 관철을 부르짖으며 아들의 시신인수를 거부하면서부터. 이후 `산고'끝에 아들의 생전소원이었던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해 노동교실을 운영하는 한편 동일방직과 Y.H노조를 비롯, 민주화운동 유가족 협의회(유가협)의 국회앞 농성현장 등 노동자들과 학생. 재야운동가들의 피맺힌 목소리가 있는 현장이면 어느 곳이든 찾아다니며 한국노동. 민주운동사의 산 증인이 되었다.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네 차례의 옥살이를 치르기도 했지만 목숨까지 버리고 노동자에 대한 사랑을 택한 아들의 스물 두 해 가열찬 넋이 항상 함께 하기에 그 어떤 시련도 이씨에게는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태일이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여기까지 버텨올 수 있었어. 태일이가 일기장에 남긴 말 한마디 한마디가 힘들 때마다 귓가에 맴돌며 채찍질이 돼주었지..." 30년의 세월은 40대의 어머니를 쇠약한 칠순의 할머니로 만들었지만 해가 갈수록 뜨겁게 달구어진 노동자들에 대한 열정마저 흔들어놓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을까. 평범한 아내.어머니로 살던 젊은 시절의 고생과 수 차례의 연금. 구속 등 몸을 아끼지 않고 현장을 지키는 사이 일주일에도 몇 번씩 병원을 찾을 정도로 병약해졌지만 아직도 오랫동안 몸담아온 유가협과 청계피복노조 일이라면 팔을 걷어 부친다.

최근 대우자동차 부도사태 등 제2의 IMF사태가 우려될 정도로 노동환경이 나빠져 수많은 노동자들이 자리를 잃는 현실에 가슴이 너무 아프다는 이씨는 "숨지기 전에 기념관 건립 등 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많은 사람들의 명예회복 작업이 마무리될 수 있도록 힘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89년 영국으로 건너가 현재 노동학 박사과정 막바지중에 있다 추모식 행사 참석을 위해 12일 저녁 귀국한 전열사의 여동생 순옥(46)씨도 "오빠의 의로운 희생의 가장 밑바닥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며 "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이 돼주었던 오빠의 정신이 현재 소외받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까지 전해졌으면 한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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