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2일 오후 5시…제부도 가는 길
"지난번은 연습이야! 연습!"


25t 덤프트럭이 앞머리에 '파업' 포스터를 붙이고 제부도 가는 길을 달리고 있다. 덤프연대 경기지부 화성지구 신풍분회 김태섭(48) 조합원의 차다. 차종은 MAN, 97년식.

오늘은 이 길을 세번째 달리고 있다. 태섭씨의 ‘한탕’ 코스는 화성에 있는 공사장에서 자갈을 싣고 서울이나 안양에 있는 레미콘회사에 부려 놓은 뒤 성남에 있는 보건대 공사현장에서 폐기물을 실어 화성에 있는 폐기물처리장으로 가는 것. 이렇게 해서 받는 돈은 16만원이다. 기름값이 50~60%를 차지하기 때문에 내려올 때 짐을 실을 수 없으면 아예 운행을 하지 않는다.

기름값이 많이 들거나 말거나 왕복 일이 자주 있으면 다행이다. 최근 들어서는 하루에 두번 하기도 힘들다. 오늘 일이 많은 것은 내일 파업 때문. 공사현장에서도 일을 미리 해놓으려는 것이다. “아주 원칙적으로 따지면 ‘막탕’은 하지 말아야죠. 그런데 아무리 물량을 확보해봤자 사흘을 못 버텨요. 소용없는 줄 아니까 파업기간 생활비도 마련해 놓을 겸 하는 거죠.”

 

 


10월12일 오후 7시…'삑삑' 울어대는 무전기
"내일 아침 덤프 끌고 집결지로!"


무전기가 연신 '삑삑' 비명을 지른다. “형님 나이도 있는데 오늘 너무 무리하면 안 돼. 내일 투쟁해야지.” 태섭씨와 같은 코스지만 운행비를 14만원밖에 안 준다고 해 차를 세워놓고 있는 같은 사무실 동생이다. 곧이어 같은 사무실의 형님이 부른다. “야, 나는 파업기금을 냈는데 투쟁조끼를 안 줘.” 밀린 조합비(한달 3만원)와 파업기금(10만원)을 다 내지 않으면 투쟁조끼를 내주지 않기로 한 덤프연대의 방침 때문이다.

파업 분위기가 난다. 평소 무전내용은 “밥 먹었다”, “길 막힌다”, “소변 마렵다”, “돈 안 된다” 등인데, 오늘은 농담에도 ‘투쟁’이 들어간다.

태섭씨가 있는 사무실에 덤프운전자는 27명. 모두 덤프연대 조합원으로 내일 파업에도 전원 참가한다. 지난 5월 파업 때는 4명이 파업에 참가하지 않고 일을 했다. 파업이 끝난 뒤 상조회는 파업에 참가하지 않은 이들에게 약간의 응징(?)을 가했고, 그 일이 있은 뒤 3명은 그만두었다.

태섭씨는 그렇게 했던 이유를 "단합을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태섭씨는 지난 파업으로 단결의 힘을 보았다. 파업으로 밀어붙이자 정부는 과적 문제에 대해 업주를 처벌할 수 있는 조치를 마련했다. 물론 현실에서는 무용지물이지만. 파업에 참여할 때는 '반신반의' 했지만 단결해서 한 목소리를 내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파업이 끝날 때 똑똑히 알게 되었다.

무전기를 타고 분회장의 파업 지침이 떨어진다. “내일 아침 7시 덤프 끌고 집결지로!” 김태섭씨는 “네에!! 내일 봅시다!”며, 짧게 답을 한다. 지난번은 연습이었다. 이번 파업은 강력할 것이다. 근거가 뭐냐고? 그건 바로 태섭씨 자신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도부의 지침에 따라 단결한다. 뒤로 빠지지 않고 앞장 서겠다.

10월13일 오전 7시…비봉면 근처 주유소
"형님! 이왕 나온 거 국회까지 덤프 끌고갈까요?"


덤프연대 경기지부 화성지구 신풍분회의 집결장소는 비봉면에 있는 주유소. 태섭씨는 덤프를 끌고 비봉주유소로 향하고 있다. 길이 막힌다. 무전을 친다. “무슨 일 있냐?” 먼저 도착해 있던 동료의 답. “주유소 앞길은 훤한데…. 이상하다.”

엉금엉금 기어가다 보니 큰길로 나가려던 덤프 5대가 경찰에 붙잡혀 있다. 그래서 길이 막힌 것이다. 집결지는 들어가는 길이라 막지 않아 무사히 통과했다. 집결지에는 이미 다른 사무실 소속의 덤프와 태섭씨 사무실에서 일하는 덤프 조합원들이 10여명 나와 있었다. 동료들은 오고 있거나, 늦은 동료들은 또다른 집결지로 속속 모이고 있었다.

오전 7시30분, 39번국도로 돌렸다. 사무실의 동생은 무전기를 붙잡고 “형님! 이왕 나온 거 국회까지 덤프 몰고 갈까요?”라며, 소리를 질러댄다. 10킬로나 갔을까. 서해안고속도로 비봉IC 근처에서 경찰이 차를 세우도록 했다. 맨앞의 화성지회장 덤프가 서고, 태섭씨도 덤프를 세웠다. 덤프 20대가 국도변에 늘어섰다.

급히 전경들을 태운 차가 한 대 왔다. 전경들이 신속, 정확하게 내리더니 맨앞의 덤프 앞에 바짝 붙어 서서는 부동자세를 취했다. 경찰은 어차피 갈 수 없으니 차를 돌리라고 했다. 화성지회장은 경기지부의 지침을 따르겠다며 버티고 있다.

10월13일 오전 9시…39번국도 비봉IC
"우리 이제 사장님 아니예요. 동지예요! 동지!"


한 10분 지나자 성질 급한 사무실의 한 동료는 벌써 흥분했다. “강제로 밀고 나가야지. 아 썅! 이렇게 할 거면 왜 나왔냐!” 태섭씨가 무전기를 들고 조곤조곤 열을 식혀준다. “화성지회장이 앞에 있으니까 지회장 말을 따라야지.”

한편 경찰은 사진기를 들고 아주 정성스레 차번호판을 찍고 있다. 한 덤프 조합원이 무전기를 들었다. “이참에 사업자 죽이고 차 남버 떼 가라!”

오전 9시, 화성지회장의 지침이 떨어졌다. 덤프를 돌려서 세워놓고, 버스를 타고 국회 앞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덤프를 버리고 버스를 탄다. 높은 덤프 운전석에서 내려다 보다 이제 땅으로 내려 와야 한다. 자신들의 두발로 걸어야 한다. 덤프 조합원들은 이렇게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덤프 조합원들은 따라 온 화성 경찰서 형사와 주거니받거니 이야기를 나눈다. 덤프 바퀴 하나만 해도 40만원이라고 설명을 하는 조합원, 과적단속 좀 하지 말라는 조합원. 대꾸하던 형사가 ‘사장님’ 하며 부르자 한 조합원이 “우리 이제 사장님 아니예요. 동지예요. 동지!”라며 껄껄 웃는다. 태섭 동지도 옆에서 “말 잘 했다”며 껄껄 웃으며, 동지의 등을 두드린다.

 

 

 

 


10월13일 오후 1시…서울로 가는 버스
"출정식 때 안 왔으니 간부들 얼굴을 모르지!"


오후 1시가 넘었다. 서울로 가는 버스 안, 태섭씨가 버스 운전기사분(태섭씨는 '기사분'을 입에 달았다)에게 서울로 가는 길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아니면 습관인지 옆으로 눈을 돌려 차창 밖을 보지 못한다. 목을 쭉 빼고 버스 앞면을 통해 바깥만 보고 있다.

다른 사무실의 분회장이 일어나 “투쟁기금이 부족하다”면서 “1만원을 더 내달라”고 간곡하게 설득을 시작한다. 덤프연대의 지침이라는 덧붙임과 함께. 한 조합원이 “파업투쟁기금으로 10만원이나 냈는데 또 내냐”고 한 마디 퉁을 주니, 분회장은 “투쟁기금이 부족하니까 이 돈으로 서울 가는 차비 할라꼬 그러나 봅니다”고 답한다.

“차비? 1만원씩 거두면 차비하고도 남는데 남는 돈은 어디에 쓰나?” 조합원이 계속 불만을 터뜨린다. “남는 돈은 경기지부 사무국장이 알아서 하겠죠”라고 분회장이 어물어물 답을 하자, 이번에는 “사무국장 얼굴도 한 번 못 봤다”는 소리가 이어진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려 하자 곁에 있던 태섭씨가 “지난번에 출정식 할 때 한번 오셨으면 지부 간부들 얼굴도 보고 좋았을 텐데…”하며 거들기 시작한다. '사장님'이 하루아침에 동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단결의 시간이 더 늘어나야, 단결의 맛을 더 보아야 될 일이다.

10월13일 오후 2시…국회 앞
"야~ 끝이 안 보인다!"


오후 2시다. 국회 앞이다. 까만색 투쟁조끼를 입은 수천명의 조합원들, 태섭씨가 신기한 듯, 자랑스러운 듯, 안심이 되는 듯 그 모습을 바라본다. “야~ 끝이 안 보인다!”, “부산 경남에서는 차가 밀려 다 못 왔다는구먼.” 사무실 동료들도 한마디씩 한다. 가슴이 벅찬 것은 태섭씨만이 아니다. 자신과 똑같은 일을 하는 덤프 운짱'사장님'들을 한 자리에서 이렇게 많이 보기는 이 일하고 나서 처음이다.

정말로 모였다. 태섭씨는 확신이 생긴다. “우리도 하면 할 수 있다.” 태섭씨는 소리 높여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따라 부른다. 시늉만 내고 싶지 않다. 내가 뭣하러 시늉만 내? 내 일, 내가 하는 건데?

태섭씨는 파업으로 그야말로 생존권을 쟁취하고 싶다. 더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 일을 해도 빚만 쌓인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덤프 운반비는 똑같다. 하도급 때문이다. 기름값은 오르고 올라 운반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덤프가 낡으면 수리비도 자꾸 늘어만 간다. 이러다 사고라도 한번 내면? 수리비만 수천만원이다.

태섭씨가 사무실에 지고 있는 빚은 4,700만원. 3년 동안 새벽 5시에 일어나 늘 1등으로 배차를 받을 정도로 부지런을 떨었지만, 빚은 줄기는커녕 더 지게 됐다. 이건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덤프 노동자들 전부의 문제다. 덤프 노동자 4천여명이 한 목소리를 낸다. “덤프 노동자 단결하여 생존권 쟁취하자!”

 

 

 

 


10월13일 오후 5시…열린우리당사 앞
"썅! 덤프만 갖고 왔어도"


국회 앞에서 한판 소리를 지른 덤프 노동자들이 열린우리당사 앞으로 모였다. 전경차가 당사의 담이다. 이 모습을 보고 덤프 노동자들이 "주차 한번 기똥차게 했다"며 혀를 내두른다. 덤프연대 지도부는 열린우리당 당의장과 면담을 요구했다. 표 줘서 집권여당으로 만들어줬으면 버선발로 뛰어 나와 환영을 해도 모자랄 지경인데, 지금 자리에 없단다. 국회를 갔대나. 아니 지금 우리가 거기서 오는 길인데?

태섭씨는 여당이다. 대통령선거 때마다 줄줄이 되는 사람만 찍었다. 단 한번 1997년 이회창 후보를 찍었을 뿐이다. 국회의원 선거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이 착잡하다. 이 자식들이 정말 우리를 뭘로 아는 거야….

순간, 덤프 노동자들이 당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전경차를 밀기 시작했다. “밀어버려!” 목소리는 컸지만, 정작 힘이 달린다. 덤프만 있었어도. "덤프 갖고 와라!"는 조합원들의 외침이 그래서 더 절실하다. 태섭씨는 대오 중간에서 힘을 냈다. 물대포가 쏟아진다.

잠시 휴전이다. 지도부는 고민하고 있다. 진짜로 밀어버리면 투쟁 경험이 없고 이미 화가 뻗칠 대로 뻗친 조합원들은 아마 끝까지 싸우려 들 것이다. 그럼 통제가 불가능해진다. 그렇다고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하고 맥없이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지도부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섭씨들은 서로 한마디씩 주억거린다. “이씨, 다음에 찍어주나 봐라.”, “찍어준 놈이 미친놈이야! 반성해야지!” 이리하여 우리의 태섭씨는 정말로 다음 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 간판만 달고 나오면 다 찍어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쥔다.

이윽고, 덤프연대 김금철 위원장이 열린우리당 이목희 의원과 면담 결과를 발표했다. “과적으로 생긴 전과는 연말 특별사면에 포함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과적 처벌과 유류가 보조금 지급 문제는 당정협의 시 최대한 반영하도록 노력하겠다.” 덤프 노동자들은 환호했다. 태섭씨도 박수를 쳤다. 아무런 확답을 받지 못했는데? "기다려 보는 거죠. 뭐." 태섭씨는 이빨을 드러내고 슬쩍 웃는다.

10월14일 새벽 3시…건국대 한 강의실
"파업 끝나면 아이들 보러가야지"

 

 

 

 

파업 출정식을 끝내고 강의실 바닥에 누웠다. 마음은 강의실 바닥이 아니라 길바닥에 누워도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잠은 오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태섭씨는 어제 새벽 3시까지 일을 하느라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일을 마칠 무렵 다른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다. 수원 매탄동 어느 아파트 공사장에서 파낸 흙을 동탄에 있는 적재장소로 실어내가는 야간작업이 있다는 것이다. 50분 정도 걸리는 거리, 회당 4만8천원. 밤새하면 왕복 10번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태섭씨는 파업이 끝나면 제주도로 아이들을 보러 갈 요량으로 일을 했다. 태섭씨의 아이들은 무려 6명이다. 스물넷부터 열하나까지 5녀1남. 장남이라 아들이 있었으면 했지만 끝까지 고집하지는 않았는데 아내가 욕심을 부렸다는 게 태섭씨의 주장이다.

대학교정에 들어서니 아이들 생각이 더 난다. 더 미안하다. 제대로 공부를 시키지 못했다. 큰딸(24)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전문대학을 야간에 다니고 있다. 둘째딸(22)은 본인이 강력하게 요구해서 전문대학을 다녔다. 본인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큰딸이 도왔다. 셋째딸(20)은 중학교 때부터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그 패스트푸드점에 취직을 했다. 나머지 아이들은 초·중·고등학생들이다.

1997년 외환위기…추락하는 사장님
"못난 자식, 못난 아버지"


태섭씨는 1997년 사업을 크게 벌렸다가 크게 망했다. 1990년, 15t 덤프 한 대로 시작해, 해마다 중고 덤프를 한대씩 늘려갔다. 기계 다루는 것을 좋아해 웬만한 수리는 직접 할 수 있었고, 사업 한답시고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한 것도 아니었고, 태어나고 자란 곳이 제주도이라 아는 안면들이 있으면 상부상조가 잘돼 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다.

1997년 갖고 있던 중고 덤프 한 대만 남기고 나머지 6대를 판 뒤 새 덤프 7대를 할부로 사들였다. 그러나 이게 '막차'를 탄 셈이 됐다. 몇달 있지 않아 외환위기가 닥쳤고, 일거리가 줄면서 수금이 잘 되지 않더니 겨우 받아낸 어음들은 그만 휴지조각이 됐다.

사업을 크게 시작한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6명이다. 남들처럼 벌어서는 제대로 공부시키기 어려울 것 같았다. 집마저 경매에 넘어갈 처지가 됐고, 아이들 공부는 고사하고 빚독촉에 시달리는 못난 아버지의 모습만 보여주고 말았다.

2000년 태섭씨는 아내와 아이들을 제주도에 남겨둔 채 도망치듯이 서울로 왔다. 큰빚은 아버지가 감귤밭 8천평을 팔아 어느 정도 갚아주셨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차라리 죽으려 했다. 못난 자식에 못난 아버지다. 그래서 태섭씨는 죽도록 더 살아야 했다.

 

 

 

 


2005년 총파업…일어서는 덤프 조합원
"대한민국도 덤프해서 먹고살 수 있어야"


외환위기 직전 사들였던 덤프 3대로 화성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특별한 연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 근처면 아무래도 일이 많을 것이라는 막연한 요량뿐이었다. 한대는 자신이 운전하고, 두대는 기사를 고용했다.

한번 나빠진 경기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서울 근처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덤프는 자꾸 말썽을 부렸다. 고장이 잦았다. 덤프 한대를 팔아 다른 덤프를 수리했다. 얼마 있지 않아 또 한대가 사고를 냈다. 수리비만 2,500만원. 사무실에서 빚을 내 수리하고는 팔아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덤프 한대와 2,500만원의 빚이 새끼를 쳐 늘어난 4,700만원의 빚.

10월 중순인데, 빌어먹을 모기들까지 극성을 부린다. 아이들 생각을 하면 덤프일을 정리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일을 해도 빚만 쌓이니 이게 일인가. 단결하면 희망이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 희망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언제 손에 잡히게 될까. 아예 덤프를 정리하고 버스회사에 취직을 해?

뒤척이다 천정을 보고 바로 눕는다. 아니다. '덤프쟁이'가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살아야 되나? 대한민국에서도 덤프해서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 이건 '덤프쟁이'의 자존심 문제다.

10월14일 오전 11시30분…과천 정부종합청사 앞
"우선 노동자성 인정이고, 그러려면 단결이다"


회상도 잠시, 3박4일 서울 집중투쟁이 끝나려 하고 있다. 사실 태섭씨와 동료들은 3박4일 서울집중투쟁이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파업 첫날 국회 앞으로 왔다. 지도부에서는 세부적인 투쟁일정을 전달하지 않았다. 더많은 조합원을 모으기 위해 고심 끝에 내린 일종의 '꼼수'였다.

태섭씨는 14일 정부 과천청사 앞에서 지난 5월 파업을 떠올렸다. 그때는 정말 덤프에 농약을 싣고 가려 했다. '덤프쟁이'들이 한 목소리를 내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울분을 삼켰다. 이번 파업에서는 과천 정부청사 앞에 더많은 덤프 연대 조합원들이 모였다. 이렇게 자꾸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다 보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덤프연대만이 희망이다.

건설교통부 면담 결과가 나왔다. 도로법 개정에 대해서는 임차인 처벌규정에 ‘건설 현장의 원수급인, 하수급인’을 명시하는 것으로 법률 전문가와 논의해 문안에 포함하겠다고 한다. 측중계 설치는 건설기술관리법을 개정하고 예산 반영과 지자체 지침 등 방안을 마련하고 수급불균형 문제는 건설기계 육성방안에 대해 연구해 여기에 노동조합의 참여를 보장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어음결제 관행과 체불임금은 표준임대차계약서를 만들어 장기어음 지급이나 체불 등을 해결하는 방안을 마련한단다.

태섭씨는 묵묵히 들었다.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하는 것보다야 나은 일 아닌가. 그러나 덤프연대의 주장은 노동자성 인정이다. 건교부의 대책은 덤프 노동자들에게 일종의 '사장님' 대우를 해주겠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단가 최저선도 정할 수 없게 된다. 노동자여야만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 받을 수 있다. 물론 이건 나중의 일이다. 태섭씨는 이 문제로 아직은 왈가왈부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선은 단결이다.

10월16일 오후 2시…대학로 전비연 출범식
"단결만 하면 되는데 왜 너만 빠지는 거야!"


태섭씨는 덤프노동자뿐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단결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전국비정규직노동조합연대회의 출범식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덤프연대 조합원들만 보이는 것 같다. 비정규직이니까 조합비 내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고 집회에 참여하는 게 어려울 것이라고 짐작은 가지만 그래도 섭섭하다. 어려울수록 뭉쳐야 되는데….

태섭씨는 3박4일 서울 집중상경투쟁을 끝내고 돌아가면 조합원들의 차를 타고 일하는 덤프차를 찾아서 혼(?)을 내줄 생각이다.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덤프쟁이' 동료로서 다 같이 먹고 살아야 되지 않겠냐고, '덤프쟁이'들이 단결해서 아무도 일을 하지 않는다면 전국의 공사장은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정부든 사업주든 덤프연대 요구를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단결만 하면 되는데 왜 너만 빠지는 거야!

태섭씨는 세상살이가 간단치가 않음을 다시 한번 느끼며, 덤프연대 조합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시위대오를 이뤄 한걸음 한걸음씩 앞으로 향해 나아갔다.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업이 안 풀리면서 아내와 사이도 소원해졌다. 제주도에서 아이들과 지내던 아내는 올 5월 태섭씨가 살고 있는 안산 옥탑방으로 왔다. 관계를 회복하자는 의도다. 한 이불 덮고 지내면서 서로에게 주고받은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부부. 3박4일 동안 홀로 지낸 아내는 다음부터 노숙투쟁 할 때는 같이 하잔다. '여보, 고마워' 태섭씨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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