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한살 노총각인 백현종씨는 8천만원 넘게 빚을 지고 있다. 사업 때문에 생긴 빚은 아니다. 집을 장만하기 위해 대출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술이나 여자, 도박 때문에 진 빚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출마환장병’ 때문에 생긴 빚이다. 백현종씨는 만으로 사십이 되기도 전에 이미 세번이나 선거에 출마했다. 1998년 지방선거 때는 구리시의원 후보로, 2002년 지방선거 때는 구리시장 후보로, 2004년 총선 때는 구리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로 나왔다.

'출마환장병'

선거를 한 번 치를 때마다 빚이 2천만원 넘게 생겼다. 앞선 선거로 진 빚을 갚기도 전에 다시 출마를 했고 그때마다 빚은 눈덩이처럼 불었다. 빚은 빚을 부른다.

약도 없고 불치병에 가깝다는 이 병의 바이러스를 현종씨에게 퍼뜨린 ‘범인’은 민주노동당이다. 현종씨는 민주노동당 구리지역위원회 위원장이다. 울산이나 창원처럼 노동자가 밀집해 살고 있는 지역이 아닌 곳에서 민주노동당 지역위원장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출마환장병’에 걸린다. 아니 걸려야 한다.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의 나무’를 가꾸는 정원사의 필수자격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병의 병력이기 때문이다.

현종씨의 병은 아직 치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치유는커녕 현종씨는 오늘도 2006년 지방선거, 네번째 출마 준비에 여념이 없다.

'무기재료공학과'

현종씨는 1966년생으로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서 아버지 백낙균씨와 어머니 김수정씨의 2남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려대 정외과를 나와 20년이 넘게 공직생활을 하셨고, 어머니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와 자식들 교육에 정성을 쏟으며 사셨다. 현종씨는 동신초등학교와 서울사대부속중학교,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시절, 현종씨의 영웅은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였다. 헤드록과 코브라트위스트를 연습해 친구들과 레슬링 시합을 벌였다. 머리가 굵어진 뒤에는 청계천상가를 돌아다니며 전자 부품을 사서 무전기나 라디오, 모형 자동차를 만들었다. 비행기나 로켓 같은 각종 무기종류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무기재료학과로 가려 했다. 그러다 그 ‘무기(無機)’가 그 ‘무기(武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허탈감에 빠졌다.

재수를 해 한국항공대학 항공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비행기 조종을 하고 싶었지만 시력이 좋지 않아 조종을 배우는 항공운항과 대신 비행기나 로켓 제작을 연구하는 항공기계공학과를 선택했다. 어찌 됐든 ‘무기재료공학’과 비슷한 곳에 들어간 것이다.

"선배들의 실수는 반복하고 싶지 않다"

겉으로만 보면, 현종씨는 박정희가 키운 도시 중산층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들은 항상 아버지를 부정하게 되어 있다.

중앙공무원훈련원에 근무하다 81년 ‘야당 성향’으로 분류돼 해직된 아버지. ‘불타는’ 교육열로 자식들을 일으켜세우던 어머니. 중학교 2학년이던 1979년 12월12일, 지축을 울리며 집 앞을 지나가던 탱크. 뛰면 집에서 오분 거리도 안 되는 아버지의 모교인 고려대 앞에 집총하고 경계를 서고 있던 공수부대.

현종씨는 1985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무엇에 홀린 듯 제 발로 ‘사회과학써클’(항공대 사회과학연구회)을 찾았다. 현종씨는 ‘운동권’이 됐다. 대학 1학년, 현종씨는 처음으로 가두시위에 나섰다. 숨겨온 유인물을 뿌리고 구호를 몇번 외쳤다. 선배들이 경찰에 끌려갔다. 5분만에 상황은 종료됐다. 싱거웠다. 선배들에게 ‘골방’에서 공부하며 준비만 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운동권’에서 ‘CA’(제헌의회그룹)가 됐다.

1987년 6월은 그의 전성시대였다. 시위대 맨 앞에서 대오를 이끌었고, 남대문경찰서 정문에 화염병을 정확히 투척해 전경들을 무장해제시킨 뒤 정문을 뚫은 전설적인 무용담도 갖게 됐다. 하지만 현종씨가 동무들에게 무용담을 자랑할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함성으로 뜨거웠던 그해 여름이 채 가기도 전에 광장을 메웠던 사람들은 발길을 돌렸고, 가슴은 식어버렸다.

가을 현종씨는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그러나 “회의가 싫었던” 현종씨는 전대협 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 단식, 농성, 수배로 이어진 대학 생활. 다음해 사면복권이 되어 학교로 돌아왔지만 총학생회는 이미 와해돼 있었다. 학교는 총학생회 간부들에게 일본연수와 취업보장이라는 미끼를 던졌다. 총학생회장 임기를 마친 현종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학교를 떠났다. 공장으로 가지도 않았다. 현종씨는 창백한 지식인의 자기혐오로 이어질 뿐인 선배들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구리로 가는 버스

1988년, 현종씨는 구리시로 가는 버스를 탔다. 구리시에 살고 있던 학교 써클 후배가 ‘가톨릭노동사목 구리노동상담소’에서 일할 사람을 찾고 있다고 귀띔했다. 일단 가서 상황을 보자며 노동상담소 문을 열었던 그 첫날, 구리 근처 석재공장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겠다며 찾아 왔다. 노동자들은 ‘작당’을 하기 위해 인근 여관으로 몰려갔고, ‘상담원’ 현종씨도 엉겁결에 따라갔다. 노동자들은 밤새워 작전을 짰고, 그는 옆에서 타자를 쳤다.

며칠 뒤 직업병에 대한 대자보를 쓴 게 문제가 돼 해고된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상담소를 찾았다. 그들이 중심이 돼 원진레이온 공장에 ‘바보회’가 결성됐다. 첫날 타자를 쳤던 ‘상담원’ 현종씨는 이번에는 유인물 만드는 일을 도왔다. 민주노조가 원진레이온에 들어섰고, 그 유명했던 원진레이온 싸움이 그가 있던 구리노동상담소에서 시작됐다.

‘상담원’ 현종씨에게는 월급이 없었다. 그냥 상담소 사무실에서 먹고 잤다. 상담소를 찾는 사람들이 밥 먹을 때 숟가락을 하나 더 얹었고, 상담소 소파에 떨어진 동전을 모아 라면을 끓여 먹었다. 상담소에 근무했던 2년 동안 그가 받았던 돈은 활동비 3만원이 전부였다. 2년 동안 3만원이었다.

박정희의 아들이 그 박정희의 또 다른 아들인 노동자의 동생이 됐다. 현종씨는 형들에게 도움이 돼야 했다.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산재보험법 등을 밑줄 그어가며 공부했다. ‘타자수’ 현종씨는 노동상담 ‘전문가’로, 구리남양주지역의 노동운동 ‘활동가’로 자랐다.

군대를 갔다 온 뒤 현종씨는 구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원진레이온노조에서 상근직을 제의해 왔다. 내용으로 치자면 노동조합 간부나 다름없지만, 공식적으로는 노조 경리였다. 그때 형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은 ‘미스 백’이었다. “어이 미스 백! 커피 한잔 타와!”


'미스백'에서 '빽샘'으로, 그리고 '백위원장'으로


1991년, 소련이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1993년, 대한민국에는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그 해 원진레이온이 폐업했고, 구리남양주지역이 공장이전촉진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지역의 노동운동도 한풀 꺾였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형들의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잔치가 끝났다’며 돌아서는 이들이 많았지만, 현종씨는 ‘경기동북부민주시민실천협의회’의 사무국장을 맡아 시계외요금 폐지, 강변역 운행버스노선 신설, 고압선철탑 싸움, 임대아파트분양 싸움 등을 꾸렸다. 정작, 그가 흔들린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1990년 민중당이 창당됐고, 1992년 한국노동당이 창당됐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 하는 운동’일 뿐이었다.

1995년, 현종씨는 학원 강사가 됐다. 수학과 물리를 가르쳤다. 학생들은 ‘빽샘’이라 부르며 따랐고, 성적 쏙쏙 올리는 명강사로 평판을 얻었으며, 학원으로부터 보약 대접까지 받았다. 학원에 가지 않을 때는 집에서 비디오를 보거나 혼자 여행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1998년 1월1일. 그는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그 전 해 겨울 ‘국민승리21’이 그를 다시 불러냈다. 1998년, 현종씨는 국민승리21 구리남양주지부를 만들고 대표가 됐다. 몸집을 불리기 위해서는 눈도장을 찍는 게 최고였다. 그 해 여름 현종씨는 지방선거에 출마했다. 당선 가능성은 0%. 오랫 동안 잠복기를 거친 뒤 그의 병이 드디어 발병한 것이었다.

구리시에서 국민승리21로 모인 사람은 모두 세명이었다. 셋이서 선거를 치렀다. 후보등록 3일 전 1천만원을 구해 기탁금을 내고, ‘깔세’ 200만원으로 선거사무실을 얻었다. 십년 전, 현종씨를 구리로 불러낸 장본인이었던 후배 김재기씨도 돈을 냈다.

선거로 생긴 빚에 국민승리21 사무실 운영을 하면서부터 카드 ‘돌려막기’가 시작됐다. 현종씨는 다시 학원강사 일에 복귀했다. 혼자 여행을 가고 혼자 비디오를 보기 위해 돈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현종씨는 국민승리21 구리남양주지부 대표를 맡으면서 결심을 했다. 더이상 굶으면서 운동할 수는 없다고. 현종씨는 대학 2학년 때 집을 나온 뒤로 집에서 돈을 받은 적이 없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 왔던 그이였지만, 돈 없이 활동하는 생활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자신의 뒤를 이어야 할 후배들에게 다른 것은 못 해 주어도 허기만큼은 전해 주고 싶지 않았다.

십년 전의 그 후배, 재기씨도 거들었다. 용산에서 컴퓨터가게를 하는 재기씨도 살림은 넉넉하지 않다. 그래도 재기씨는 100원을 벌면 50원을 선배에게 넘겼다. 재기씨에게는 선배의 병을 고칠 재주가 없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선배가 걸리지 않았다면 재기씨가 걸렸을지도 모를 그런 병이었다. 재기씨는 약값을 댔다.

병에 걸린 선배, 약값 대는 후배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했다. 정들었던 국민승리21 간판을 내리고 민주노동당 구리시 지구당으로 선관위에 공식등록 했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보던 얼굴도 있었고, 못 보던 얼굴도 있었다. 다들 열심히 해보자며 어깨를 부여안고 두손을 맞잡았다. 구리시 인창동 최촌마을 철거민 투쟁, 아차산 골프장 건설 저지, 농수산시장 활성화. 현종씨들은 유권자를 만나게 됐다.


2002년 지방선거가 다가왔다. 나설 후보가 없었다. 어떤 병이든 많은 사람이 걸리면 좋지 않은 법이다. 현종씨는 시장후보로 출마했다. 시의원으로 출마했던 때보다 상황이 좋아졌다. 당비도 있었고, 후원금도 있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에게는 그 옛날 현종씨에게 형이 있었던 것처럼 민주노총이라는 형이 있었다. 지역의 노동자들이 선거를 도왔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배가 고팠다. 재기씨들이 약값을 또 댔다.

2002년 겨울의 대통령선거도 그렇게 치렀다. 현종씨는 기뻤다. 당원은 계속 늘어났고, 권영길 후보는 100만표에 가까운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2004년의 총선. 민주노동당은 원내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원내진출의 주공격로는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였다. 그리고 그 주공격로를 엄호해야 할 보조공격수야말로 현종씨였다.

‘착한 사람들의 정당’ 민주노동당이라고 하지만, 당선 가능성이 있다면 후보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도 없었다. 당선 가능성이 낮다고 하지만 그래도 지역구 후보다. 현종씨는 자신의 이름보다 민주노동당 정당번호 12번을 목이 터져라 알리고 다녔다. 속이 쓰렸냐고? 민주노동당의 ‘출마환장병’은 ‘위장병’과는 상극이다.

세번의 선거와 8천만원의 빚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 현종씨가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일까. 그러나 그는 대차대조표를 쓰지 않는다. “십년쯤 뒤에 한번 써볼까?” 

현종씨는 구리시내에서 원룸을 얻어 살고 있다. 원룸의 크기는 7평.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29만원을 주고 있다. 3년 전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13만원짜리 방에서 살았다. 10년 동안 살면서 수재의연품을 세 번 받았다. 회의하다 비 오면 집으로 뛰어가기 일쑤. 현재 한 달 수입은 1백20만원이다. 일주일에 세 번, 학원에서 수업을 한다. 세상이란 게 ‘궁즉통’이라 학원 원장이 당원이다.

월세로 29만원이 지출되고, 그 다음은 카드빚 900만원 대환대출금 20만원, 은행대출금 3천만원 이자 29만원이 나간다. 개인에게 빌린 1천만원에 대한 이자 10만원, 후원회비, 휴대폰 요금 각종 공과금을 내고 나면 1백20만원은 그야말로 동전 한닢 남지 않는다. 그럼 현종씨는 뭘 먹고 살지? 이래서 한 달에 50만원씩 또 적자가 난다. 이 돈은 그 옛날 써클 선후배들이 1년에 한번씩 푸닥거리 하는 셈치고 치워준다.

현종씨 가계부
9월 지출 수입
금융권 이자 290,000 
카드 이자 200,000
개인에게 빌린 돈 이자 100,000
월세 290,000
당비 10,000
구리시민장학회 후원금 10,000
엠네스티 후원금 10,000
문익환목사기념사업회 후원금10,000
신문구독료 12,000
도시가스 29,590
관리비 16,200
한국통신 72,180
케이블 요금 20,950
전기요금 77,000(2달치)

계=1,207,920

(의료보험과 국민연금, 생활비가 빠졌다.
통장에 돈이 없어 어디선가 빌려 해결을 해야 된다)

* 실제 가계부를 작성한 적은 없음.
1,200,000(학원강사료)

민주노동당에도 빈부격차가 있다?

마음의 빚이 더 무겁다지만 그 빚을 무겁게 느끼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빚을 갚는 심정으로. 뜻을 꺾지 않고 사는 모습이 좋아서. 아직 철 들지 않은 것 같아 위태롭게 보여서. 민주노동당을 지지해서. 세상에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제일 부러워서. 현종씨의 친구들은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이유로 그를 돕는다.

그러나 현종씨들이 많이 생기는 것은 민주노동당을 위해서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현종씨는 당의 재정운영에 대해 불만이 많다. 지역위원회 교부금이 당원수에 따라 정해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당원수가 적은 지역위원회는 가난한 지역위원회, 당원수가 아주 많은 지역위원회는 부자 지역위원회가 되고 있다. 가난한 지역위원회는 사업비가 없어 당원수가 늘어나지 않을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부자’ 지역위원회와 격차가 벌어진다. 빈부격차를 없애겠다고 시작한 민주노동당이 웬걸 당내에 빈부격차를 실현하는 셈이다.

그래도 현종씨는 민주노동당에 ‘출마환장병’ 환자들이 더 많이 나와야 된다고 주장한다. 아직도 권영길과 노회찬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물론 현종씨 역시 사람이어서 질 게 뻔한 선거지만 막상 지고나면 기분이 더럽다. 그때는 당원들이 술 받아 현종씨를 달랜다. “위원장, 다음에는 이길 꺼야!”

앞으로 10년은 더 버틸 수 있다는 현종씨. 현종씨는 ‘노총각’ 당원들과 ‘보육’ 모임을 하며 지역위원회 활동을 하고 있다. 보육은 서민생활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기에 구리시의 보육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아 사업을 하는 게 올해 구리시지역위원회 사업계획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보육을 노총각들이 책임진단다. 현종씨도 노총각, 사무국장도 노총각, 시꺼먼 노총각들이 모여앉아 보육을 논한다. 구리시 지역위 핵심당원들 가운데에는 특이하게도 노총각들이 많다. 언젠가는 노총각 당원 다섯명과 함께 아침저녁으로 학교급식조례 제정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추운 겨울 입술까지 터졌다.

캠페인이 끝난 뒤 뒤풀이에서 이 노총각들의 심통이 드디어 터졌다. “아, 애도 없는 우리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 거야!” 그러나 그때뿐. 이 노총각들은 전국 최초로 구리시에서 학교급식조례를 제정하는 쾌거를 올렸다. 그렇다고 누가 선 보는 자리라도 주선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뿌리에서 꽃이 나고 꽃이 썩어 뿌리를 기른다

현종씨들은 누굴까. 꽃인가? 씨앗인가? 줄기인가? 뿌리인가?

“그러나 그가 기어코 봄을 기다려 피어나고야 말 꽃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가 강물이고, 강물위에 떨어진 불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기어코 어둠을 사르고야 말 불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솔직히 말해서’, 김남주)

현종씨들은 이제까지 순전히 자신과 주변의 힘과 도움으로만 버텨 왔다. 그것은 한때는 불가피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정상이 아닌 것을 언제까지 고집할 수는 없다. 그것은 현종씨들에게도, 그리고 현종씨들이 그렇게 고생하며 키워 온 민주노동당에게도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박봉에 시달렸을 <매일노동뉴스>의 선배들. 아니 지금도 별 다를 바 없을 그 많은 진보언론의 선배들. 그들과 현종씨들은 친구다. 그들은 ‘동병상련’이라는 씨줄과 '이심전심'이라는 날줄로 연결돼 있는 것이다. '조중동'의 기자들과 보수양당의 '국회의원환장병' 환자들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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