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시 칠곡군 구미3국가공단. 구미역에서 구미공단으로 접어들자 ‘코오롱’ 공장이 들어온다. 그곳에서 5분여를 달리니 엘지필립스LCD 공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고, 도로 옆 굴뚝 건물 ‘금강화섬’이 눈에 들어온다. "공장은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는 현수막 아래 공장 입구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다. 꼬불꼬불 미로처럼 얽힌 길은 한 사람이 드나들기에도 좁다. 공장 안의 육중한 기계들은 멈춰 섰고, 넓은 터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공장은 다시 돌아가야 한다”

금강화섬은 지난해 3월 이후 1년 5개월여 동안 가동이 중단되고 있다. 지난 24일은 금강화섬의 공장 가동이 멈춘 지 517일째 되는 날. 공교롭게도 한국통신계약직노조의 투쟁일자와 똑같다. ‘고용승계’와 ‘생계보장’을 요구하며 노조는 지난 5월30일 ‘공장사수투쟁위’로 전환해 공장을 지키고 있다. 50여명의 조합원들은 “공장은 자본가의 전유물이 아니다”며 “공장은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목놓아 외친다.

휴업수당, 퇴직금은 까먹은 지 오래다. 실업급여도 지난해말 종료됐다. 조합원들은 생계와 투쟁을 병행해 가며 공사장, 청소, 식당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 왔다. 이 과정에서 270명이 넘던 조합원들이 5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부모님이 공장에 찾아와 “그만하면 됐다”며 꾸짖거나 가족들이 와서 “나와 돈벌어라”는 하소연도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이혼하자”는 말에 괴로워하면서도 끈질긴 투쟁을 이어왔다. “여태 버텼는데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자!” “끝을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남은 조합원들은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있다.

투쟁기금 마련 재정사업을 위해 포스터와 자료를 봉투에 담고 있는 조합원들. 일주일에 하루이틀 정도 노가다 나가서 5~10만원 가까스로 넣어주곤 했는데 ‘공장사수투쟁’ 이후 석 달 동안 번 돈이 한 푼도 없다. “가계부가 얼마나 펑크났냐”고 아내에게 물어 볼 용감한(?) 사람은 없다. 괜히 싸우기나 하기 때문이다. “가족이 먼저냐 투쟁이 먼저냐?” “그만 접어라.” 심각한 생계의 위기 앞에 가족들의 볼멘 소리는 갈수록 더해만 간다.

아이들 얼굴조차 보지 못하게 할 때는 가슴 속 설움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그럴수록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며 ‘끝장을 보자’는 각오로 이를 앙다물게 된다. “힘들어 접을 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투쟁을) 시작했나!”

마음이 힘들어지면 동지들과 토론과정에서도 쉬이 언성이 높아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생존의 위기, 분열을 초래한 것은 ‘자본’의 횡포임을 잘 알기 때문에 이내 서로의 마음을 다독인다. 하나둘씩 떠나가는 동지들을 볼 때도 동지에 대한 원망은 하지 않는다. “나쁜 놈의 XX들. 당장은 힘들어도 우리 가족과 동지들이 살 길은 결국 고용승계, 투쟁의 승리뿐이다.” 분을 삭이며 멈출 수 없는 투쟁의 각오를 거듭 다질 뿐이다.


“택시를 놀게 하는 게 낫지 니들은 안 받아”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한 공장이기에 이용만 당했다는 배신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청춘을 바친 회사인데 이렇게 아무런 성과 없이 나올 수는 없는 일이죠.” 공적자금 1,400여억원이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 회사가 어렵다고 해서 일인당 몇백만원씩 회사 주식을 샀지만 휴지조각이 되었을 뿐이다.

20대 초·중반이었던 노동자들은 이제 30대 초·중반이 되었다. 다른 공장 취업도 어려운 처지다. “젊은이들 남아도는데 나이든 노동자를 쓰질 않죠. 설사 취업이 되더라도 비정규, 일용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어요.” 나간 이들의 말은 더욱 마음을 뒤숭숭하게 한다.

“차라리 택시를 놀게 하는 게 낫지 안 받아준다.” 금강화섬 출신이란 이유로 채용에서 탈락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공장을 지키는 노동자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절친한 친구들조차 빨갱이라고 하는 데는 말문이 막힐 뿐이다. “혁명하자는 것도 아니고 먹고 살라고 하는데….” 규찰을 서고 있던 한 조합원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철야로 교대하며 규찰을 서는 노동자들. 주말 나들이 다녀오는 가족들을 보노라면 콧날이 시큰해지고 가슴이 짠해진다. ‘무늬만 아버지’인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도 생긴다. “이 싸움이 끝나면 일주일, 열흘 꼭 시간 내서 가족여행 가고 싶어요.”

금강화섬노조 투쟁 일지
2004.3.25 공장 가동중단
2004.4.12 종업원 330명 15일부로 정리해고 통보
2004.4.16 회사 정리해고 철회, 정상가동 불가능, 경매 통보
2004.5.4 퇴직금 중간정산 50% 지급
2004.4~5월 노조 대시민 선전전, 공장사수 투쟁 전개
2004.6 노조 1차 상경투쟁, 체불임금 지급 및 한국합섬 사장과 인수시 ‘고용,노조,단협’ 승계 합의.
2004.8 지역선전전 및 조합원 교육
2004.9 한국합섬 인수 불투명지면서 다시 대정부 투쟁준비
2004.11 제조업 공동화 저지 2차 상경투쟁, ‘섬유산업 공동화 대응’ 국회 토론 참석
2004.12 3차 상경투쟁
2005.2.11 4차 경매 통해 경한인더스트리(경한정밀, 신일전기, 영창테크가 설립)에 320억원 낙찰.
2005.3 노조 공장재가동, 노조, 단협, 고용승계 요구 창원의 경한정밀 1, 2차 타격투쟁.
2005.4 투쟁장기화 대비 생계투쟁 돌입
2005.5 공장사수투쟁위원회로 조직전환, 경한정밀 3차 타격투쟁.
2005.6 김해의 신일전기 타격투쟁.
2005.7.22 코오롱정투위와 투쟁문화제 개최(경찰과 충돌), 위원장 등 고소고발
2005.8~ 노조원 37명에 대한 19억3천만원 1차 손배가압류. 19명에 대해 19억3천만원 2차 손배가압류(비조합원 13명 포함)
고독한 ‘투쟁의 섬’ 속에 갇힌 이들에게 각 단체의 연대는 큰 힘이 된다. 특히 담 하나를 사이에 둔 한국합섬노조는 동병상련의 처지이기에 더욱 그렇다. 한국합섬노조는 단전단수된 금강화섬에 식수와 전기를 공급해 주고 있다. 또 올초부터는 조합원 3천원, 간부들 몇만원씩을 각출해 매달 280여만원씩 투쟁기금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합섬노조의 이정훈 위원장은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반기에 원자재 상승 등으로 가동률이 25% 줄었어요. 라인이 선 것은 15년만에 처음이었죠. 한국합섬 조합원들의 불안감도 상당합니다.” 현재 금강화섬 옆 엘지전자 부지는 99년도 대하합섬이 있던 자리. 1년6개월여 폐업투쟁을 진행했지만 결국 기계는 해외매각되고 부지는 물류창고로 분할매각 되었던 터였다. 섬유산업 공동화의 위기는 언제 닥칠지 모를 ‘시기의 문제’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백문기 금강화섬노조 위원장의 마음은 누구보다 착잡할 터. 협상 가능성을 물었다. “대화채널 가동이 무의미 할 수도 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이죠. (경한이) 2억4천만원(노조발전기금)을 툭 던지고 (노조한테) 집으로 가란다면 대화가 될 수가 없죠.” 전날 몇몇 조합원들과 야간산행까지 다녀 온 위원장. “인수회사가 손배·가압류, 고소·고발을 남발하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죠.” 전면적인 투쟁을 각오하는 표정이었다.

사측, 노조 '불법집단' 규정…손배·가압류 확대

사측은 강경한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금강화섬을 인수한 경한이 노조를 ‘불법집단’이라며 배제하고 ‘법과 원칙’을 내세우고 있는 상황. 320억원에 금강화섬을 인수한 경한인더스트리는 경한정밀(창원), 신일전기(김해), 영창테크(대구) 등 중소기업 3사가 지난 2월1일 법원 경매를 앞두고 자본금 5천만원으로 만든 회사다. 당시 법원 감정평가액이 1,200억원인 것을 감안하면 헐값에 매입한 것이지만 대한합섬 등 인수를 희망했던 업계는 최대 250억원을 예상했다.

경한인더스트리의 현재 자본금은 30억원으로 경한이 52%, 신일 47% 영창 1%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세 회사의 사장은 한국중소기업이업종교류연합회의 지역 대표로서 교분을 쌓았고, 세 회사 모두 노조는 없다.

경한인더스트리는 ‘노조가 있는 것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불법집단’과는 더이상 이야기 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8월초 37명의 노동자에 대한 손배·가압류에 이어 8월말 19명(비조합원 13명 포함)을 추가했으며, 경찰을 통한 고소고발을 계속할 방침이다.

경한측은 지난 2월15일 노조 백문기 위원장 등 5명과 만나 15개 라인 가운데 4개 라인을 가동하고 인원은 노조추천 40명만 채용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후 노조의 100% 고용보장을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가 상식을 벗어났다는 이유로 사측은 계획을 바꾼다. 4개 라인도 가동이 ‘불가’하다는 것. 경한인더스트리의 법인 등기부 등본은 이를 잘 보여준다. 애초 섬유제조업으로 등록됐던 것이 5월말경 복합종합물류업과 기계제작, 자동차부품 가공업 등으로 업종 및 업태 변경이 이뤄졌다.

경한측은 향후 사업계획에 대해 “기계설비의 해외매각도 살 사람이 나서지 않고 있으며, 물류단지는 용도변경이 필요한데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고 아직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며 “현재 사업계획 구체화를 위한 컨설팅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비장한 각오, 투쟁 속의 여유

경한측은 노조의 고용 및 생계보장 요구에 무차별 ‘손배가압류’와 ‘고소고발’로 답할 뿐이다. “끝까지 가보자!” 비장한 결기와 다부진 각오의 기운이 공장을 휘감고 있다. 고용과 생계보장을 요구하는 노조의 투쟁은 이후 더 치열해 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앞일은 ‘시계제로’의 상태다. 금강화섬노조 차헌호 사무국장은 화섬업계의 상황을 설명한다. 공급과잉과 원료가 상승 및 금리부담 등 '삼중고' 속에 신음하고 있는 현실. 이미 워크아웃(고합, 새한, 동국무역), 법정관리(한일합섬), 화의(금강화섬), 청산(대하합섬) 등의 진통을 겪어 왔던 것. ‘제조공동화’는 중국 등으로 생산시설 이전을 넘어 벌써 실패하고 돌아오는 단계에 이르렀다. 상시적 구조조정이 만연하지만 노동현장은 속수무책이다. 정부는 대책 없이 뒷짐만 지고 있다.

민주노총 화섬연맹 유영구 교선실장은 “제조업 공동화에 대응하는 뚜렷한 해법을 (노동계도) 제시하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고 현장 분위기도 시들해지고 있다”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그러나 “현재 금강화섬도 사측의 압박과 협상의 어려움 등 갑갑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라고 못 박았다.

주객관적인 조건이 좋지 않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노동자의 ‘여유’를 되찾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다.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중도하차하게 되어 동지들께 미안하고…구차한 이야기는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 우짜든(어쨌든) 끝까지 투쟁해서 꼭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투쟁’.” 생계를 위해 부득이 조합을 탈퇴했지만 그들이 떠나면서 남긴 메모는 동지들의 투쟁이 끝내 승리하길 기원하고 있었다.

삭막한 공장 안, 아이의 ‘예쁜 짓’ 해맑은 미소도 노동자의 투쟁을 지탱하게 하는 또 하나의 지렛대이다. 한 여성조합원에게 투쟁을 지속하는 이유를 물었다. “건강한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죠.” 돌아오는 답은 간결했다. 남자 조합원들이 잘 챙겨주고 식사라도 도와야겠다는 동참 차원이라지만 여유를 잃지 않는 여성 조합원의 미소는 닫힌 공장에 활짝 열린 꽃이었다. 그들이 건강한 웃음을 되찾을 날은 언제일까?

“그들은 노조원이 아닌 불법집단”
인수업체 경한 ‘법과원칙’ 강조…조합원 전원 손배가압류 강경대응 방침 
‘공장재가동’과 ‘고용·생계보장’을 요구하는 금강화섬노조의 요구에 대해 경한인더스트리의 경영진들은 재가동은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이상연 대표이사와는 몇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전화를 받지 않았고, 공동투자자인 박두경 이사(신일전기 대표)와 전영호 감사(영창테크 대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박 대표는 노조와의 접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노조가 있는 것 자체가 불법”이라며 “(노조와) 만나면 대화가 안돼요. 남의 회사까지 와서 노조가 집회하는데 그러면 어느 기업주가 사업하려고 하겠냐”며 노조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박 대표는 향후 노조와의 대화의향에 대해 “정상이 아닌 사람들과 대화는 없다. 법대로 하겠다”며 “어떤 사업을 하던지 고용승계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박 대표는 또 향후 공장운영과 관련 “합섬이 안돼 4개 라인도 못 돌리고, 기계매각도 살 사람이 나선 것도 아니다”며 “물류단지 또한 정부의 허가가 떨어져야 하는데 아직 신청도 안한 단계”라고 설명했다. 경한쪽은 설비 해외매각과 복합물류사업을 유력하게 보고 있으나 현재 사업계획 수립을 위한 컨설팅을 의뢰한 상태.


“이것도 저것도 아무 것도 안되고 있다”며 볼멘소리를 터트리는 박 대표는 “노조가 주장하는 노조발전기금 2억원 지급은 (회사가) 약속한 적 없고, 노조가 오히려 20억원을 요구하더라”고 거듭 노조에 대한 불신을 토로했다.


전 감사의 노조에 대한 불만은 더욱 높았다. 전 감사는 “금강화섬 회사 자체가 없어졌는데 노조가 있을 수 없고 그들은 ‘불법집단’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대화는 몇 차례 이뤄졌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금강이 노조 때문에 문 닫은 회사 아닌가? 노조 때문에 경락을 취소하려고도 했지 않느냐”며 “1차 손배가압류에 이어 55명 조합원 전원에 대해 손배가압류를 추진중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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