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년여 동안 ‘스크린쿼터운동’의 선봉에 서왔던 양기환 처장은 요즘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다. 그가 맡고 있는 직책만 4~5개가 넘는다.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사무처장, 한국세계문화기구를 위한 연대회의 집행위원장, 문화다양성포럼 운영위원 등등. 16일 오후 서울 남산 초입에 위치한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사무실. 양기환 사무처장은 오는 23일부터 진행될 ‘라모네’ 초청강연과 대담 등 일정을 점검하느라 정신이 없다.
반세계화 선봉 ‘라모네’ 한국 방문 성사
세계적인 석학이자 반세계화 운동의 중심에 서있는 <르몽드 디쁠로마띠끄>의 라모네 편집인 초청을 성사시킨 양기환 사무처장. “국내의 스크린쿼터 운동을 문화다양성과 반세계화운동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데 큰 영향을 준 인물이죠.” 양 처장은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하게 될 라모네 편집인이 “흔쾌히 초청에 응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2~3년 전에 라모네 편집인이 쓴 ‘소리 없는 프로파간다’라는 책을 읽고 굉장히 놀라웠다는 양 사무처장. “저서는 패권주의 문화를 적나라하게 분석하고 있죠. 라모네는 또 투기자본에 금융거래관세인 ‘토빈세’를 걷어 제3세계에 지원하자는 운동이나 WTO반대투쟁을 주도하면서 반세계화의 중심에 서 있어요.”
라모네는 오는 23일부터 나흘간 서울에서 ‘대안적 세계화와 미국의 문화패권주의 및 문화다양성’을 주제로 한 강연과 <매일노동뉴스> 등 각종 언론 대담 등을 펼칠 계획이다.
행사 주최인 ‘문화다양성포럼’은 향후 회원배가와 함께 정부에 대한 압박을 지속할 계획이다. “문화다양성협약이 올해 채택되더라도 정부가 미국 등의 통상압력에 맞서 이 카드를 적극 활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죠.” 양 사무처장은 노동사회단체의 연대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노동, 민중진영은 반세계화, 신자유주의 극복을 외치고 있지만 전술, 즉 각론이 없잖아요. 모든 좌파들이 문화다양성 분야에 달라붙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양 처장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첨병,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세계무역기구(WTO)체제에 일대 균열을 낸다는 의미에서 문화다양성협약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WTO에서 문화라는 방대한 영역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자본에 일대 파열구를 내는 것입니다. 또 세계무역협상에서 교육·의료·보건 등 공공성 영역의 이탈은 물론 농업분야의 재협상 여지도 생기는 거지요.”
미국 주도 ‘문화 획일주의’에 일대 타격을
문화다양성. 문화가 다양함은 지극히 상식적인데도 왜 문화다양성이 화두가 되고 있는가. 신자유주의 광풍은 사회(구성원)의 특유한 정신적·물질직·지적·감성적 특성의 총체인 문화마저 시장논리를 적용하려 하고 있다. 미국 주도의 문화획일주의와 문화패권주의에 맞서 자국 문화를 보호하기 위한 ‘소리 없는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계 90여개국 600여 문화단체의 연대모임인 국제문화전문가단체(CCD)는 지난 9일부터 11일까지 스페인에서 4차 총회를 개최하고 ‘마드리드 선언’을 이끌어냈다.
한국대표로 이 총회에 참석한 양기환 처장(세계문화기구를 위한 연대회의 집행위원장)은 ‘마드리드선언’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의 지연전술로 인해 물 건너갈 위기에 있었던 ‘문화다양성 협약안’ 가운데 ‘법적 구속력’을 강제한 유네스코 정부간회의 의장안(A안)을 지지 천명한 것이 큰 의미입니다.” 이 안에는 문화다양성에 심각한 위협이 있을 때 협약이 타 국제법에 앞선다는 구속력과 함께 문화다양성기금을 마련해 개도국을 지원한다는 등의 획기적인 내용이 들어있는 것.
미국과 일본의 끊임없는 반대와 지연에도 불구하고 2003년 7월 제안된 문화다양성협약 체결은 이제 ‘초읽기’에 들어갔다. 5월말 3차 정부간 회의를 거쳐, 오는 10월 협약 채택을 결정하는 유네스코 제33차 총회를 앞두고 있는 상황. 세계 문화단체들은 각국 정부를 압박해 결의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마드리드 총회에서는 ‘노무현 시계’가 구설수에 올랐다.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3차 총회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이 청와대에서 선물 받은 시계를 자랑스레 치켜들었던 것. 노무현 시계는 패권주의 대항마로써 한국과 문화다양성운동의 상징물이었던 셈.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양 처장은 우리나라의 상황을 전해줬다. “미국의 전방위적 통상압력에 밀린 정부는 스크린쿼터에 대한 양보입장을 밝히는 등 위태로운 시기이다.” 그러자 각국 대표들은 “그렇다면 즉각 반납하겠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미국 주도의 문화패권주의에 맞서 ‘문화다양성협약’을 강제하고자 하는 노력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양 처장이 인터뷰 말미에 던진 말은 이랬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며 문화다양성협약에 대한 입장이 아직도 없어요. 협약이 10월에 통과되더라도 30개국 이상의 비준이 있어야 법적효력을 갖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비준을 촉구하는 등의 운동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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