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연설 중 가장 ‘대통령다운’ 연설을 우리는 보았다. 12일 LA에서 있었던 국제관계협의회(WAC)에서 북핵문제와 관련해 행한 연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 연설이 가장 대통령다운 연설인 이유는 한반도와 동북아는 물론이고 미국과 EU 등이 주목해온 국제적 쟁점인 북핵문제 해결에 대한 강한 의지를 천명했으며, 그 해결과 관련 지켜져야 할 기본원칙과 그 원칙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우선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집권 2기를 맞이한 부시 미행정부가 대북강경정책을 구사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예측되고 있는 가운데 이루어진 이번 연설은 그 시기에서도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수구보수 세력은 이 연설을 두고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 정부 여당과 또 한번의 전투를 치를 태세를 갖추고 있는 듯 하다. 20일 있을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이 북을 두둔하고 미국을 비판함으로써 한미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며 강도 높은 비판을 하고 나선 것이다.
 

 
한나라당 국제위원장인 박진 의원은 “북핵을 체제안보 위협으로 인식하고 해결해야 할 정부에서 대통령이 나서서 북핵개발의 당위성과 합리성을 인정한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충격적”이라며 “한미관계와 6자회담에 폭탄을 던진 격”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인도 “외교는 현실”인데, “노대통령의 발언은 미국도 북한도 설득할 수 없는 비현실성을 갖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임태희 대변인은 “지금은 한미공조가 어느 때 보다도 중요한 때인데, 대통령의 발언은 미국보다는 북한 입장을 이해하는 것으로 비쳐진다”며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
 
현 정부 여당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은 학계와 외교가 일부에서도 “대통령이 공개적인 강연을 통해 미국의 대북정책을 비판한 것은 외교적으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북한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경고의 메세지를 전달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번 연설도 마찬가지"라는 등 불만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수구보수 세력들의 이러한 평가와 반응은 데마고그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우선 북을 두둔했다는 지적을 보도록 하자. 노무현 대통령은 연설의 서두에서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우리의 의지와 북한의 핵보유를 결코 용납 못한다는 우리의 의지는 확고하”며, “북핵문제는 6자회담을 통해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하고, “6자회담 성공을 위해서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연설은 북핵문제 해결과 그것을 위한 6자회담의 성공과 관련 북한이 열쇠를 쥐고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은 이번 연설에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수단이라고 한 것 등에 대해 “합리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혹은 “여러 상황에 비춰 일리가 있는 측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박진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이 북핵개발의 당위성과 합리성을 인정했다고 호들갑을 떠는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무지의 소치이거나 의도적인 왜곡에 불과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북핵개발 자체의 당위성과 합리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북핵이 억제력을 갖는다는 북한의 주장이 북한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일 수 있거나 일리가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전여옥 대변인의 말처럼 외교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교행위자가 도대체 어떠한 기준을 갖고 어떠한 판단을 하고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의 이번 연설은 한미공조에 폭탄을 던진 것이 아니라, 한미공조를 튼튼히 하는 데 전제가 될 수 밖에 없는 북한에 대한 인식공유의 필요성과, 미국 대북정책의 바람직한 방향을 밝힌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번 연설 이전에 이미 한나라당과 수구보수 세력들에게 일종의 신앙과도 같은 한미공조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지난 4일 한미연합사 창설 26주년 기념식에서였다.
 
그리고 정부 역시 부시 대통령의 재선과 동시에 한미공조체제를 더욱 강화할 뜻을 내비친 바 있다. 따라서 이번 연설은 한미공조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선결되어야 할 과제를 구체화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은 이번 연설에서 “북한이 (핵 포기라는) 결단을 하도록 우리도 몇 가지 문제를 해소·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무력행사의 가능성까지 포괄하고 있는 네오콘의 대북강경정책에 대한 유용성 제고이다.
 
존스홉킨스 대학 동아시아연구소장인 켄트 콜더 교수는 부시 재선 이후 “미국은 절대 군사력 사용가능성을 접어두지 않을 것이며, 압박외교 과정에서 호전적인 위협이 나올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와 함께 그는 북한에 당근을 제공하는 방법을 통해 “부시 행정부가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향해 큰 발을 내딛는다면 엄청난 성과를 낼 수 있고 부시 대통령에게 2005년은 영광의 해가 될 수 있다”고 충고했다.
 
한국의 저명한 외교 전문가인 김경원 고려대 석좌 교수는 미 대선 직전에 “미국의 대북압박정책이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며, “미국이 대북 네거티브 인센티브로 전환할 때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긍정적 인센티브를 제의할 때에 가능한 최대한의 신축성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북한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최선을 다했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번 연설이 대통령다운 연설인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이번 연설은 켄트 콜더나 김경원 교수 등 내로라하는 외교정책 전문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강조한 북한의 결단과 이를 유도할 수 있는 미국의 보다 창의적이고 신축적인 대북정책 구사의 필요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 외교도 모르는 철부지의 독선이라는 비판을 극복하기 위해 전문가들의 고언을 귀담아 듣고 이를 공식적인 입장표명에 반영한 것이다.
 
심지어 이번 연설에는 조선일보의 대표 논객 김대중씨의 의견마저도 반영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 씨는 자신의 칼럼에서 “노정권과 부시 정권의 관계는 한국의 안보상황이나 반미성향에 좌우된다기 보다 미국과 북한 간의 관계에서 더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는 한미공조의 원활함은 미국과 북한의 관계 개선에 달려 있다고 한 것인데, 노무현 대통령이 이번 연설을 통해 북한의 결단과 미국의 창의적이고 신축적인 대응을 요구한 것은 북한과 미국 양자 간의 관계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과 수구보수세력은 이번 연설에 대해 부정적이다. 이들이야말로 사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자신들이 나라를 책임질 수 있다고 떠드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 아닌가 말이다.
 
이런 그들에게 가르침을 하나 주자. 외교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표면에 드러난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찾아내는 것이다. 이번 연설에 부정적인 평가와 반응을 보인 자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북한의 결단과 미국의 창의적이고도 신축적 대응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면에 도대체 어떠한 외교전략이 숨겨져 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비판만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판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나서 해도 될 일이다. 사실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 역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다. 외교전문역량 운운하며 이를 모를 일 없는 한나라당과 수구보수 세력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얼마나 잘 찾아내는지 우리 모두 지켜볼 일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