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년. 스물 다섯의 노회찬은 배낭에 마르크스, 레닌 원전 수십권을 담고 전북 고창 선운사 참당암으로 향했다. 그는 전기불도 없던 참당암 나한전에서 성찰을 거듭한 끝에 73년 유신독재반대 박정희 타도 유인물 제작, 살포를 시작으로 몸 담았던 10여년에 걸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노동자들이 조직화, 세력화되어 앞장설 때만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노동자, 농민이 주인되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일에 일생을 투신키로 결단했다.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 신화 속에, 전두환의 군홧발에 숨겨간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만큼이나 꽃망울이 ‘통째로 뚝뚝’ 서럽게 떨어져버린 동백의 그림자를 보며 그는 ‘노동자’로의 길을 걷기로 했다. 82년 인천에 있던 현대정공 하청회사에 입사, 초보적인 운동을 시작한 그는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해서 용접기술도 배웠다. 외롭게, 혼자 영어, 일어로 된 노동운동 관련 서적을 탐독하면서 ‘일’을 도모해보려던 그는 83, 84년 이른바 ‘위장취업자’들이 하나둘 현장으로 들어온 것을 계기로 써클을 만들었고, 그게 바로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이었다.

그는 비합법 정당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반합법 정치노동자 조직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이후에도 민중당,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진보정당추진위, 국민승리21, 민주노동당에 이르기까지 노동자 진보정당 운동의 살아있는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 길을 걸었다.


“민주노동당,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났어?”

그런 그는 요즈음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역사상 첫 노동자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이 예상되는 올 총선을 앞두고 각종 TV토론에서 민주노동당 ‘선수’로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똑똑하다, 논리정연하다”는 인상을 주기보다는 “나도 저 얘기 하고 싶었는데”라는 생각이 들게끔 유권자들이 그동안 가슴 속에 응어리진 것을 말하는 ‘화법’이 절묘하게 유권자들을 파고 들고 있다. 이미 인터넷에는 몇 개의 팬카페가 생겼고 이곳저곳 사이트에서 ‘노회찬 어록’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허허… 격세지감을 느끼죠. 오늘(5일)도 식목일 행사 때문에 동작갑에 갔는데 저를 알아본 유권자들이 악수를 청하기도 하고 ‘화이팅’이라고 외치기도 하더라구요.”


이미 10여년 넘게 진보정당 운동에 매진해 온 그에게 눈 앞에 다가온 원내진출은 어떤 의미일까?

“진작에 노동자를 대변하는 진보정당이 나왔어야 했는데, 이제사 된 겁니다. 늦었죠. 민주노동당은 4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뿌리는 더 깁니다. 그 힘은 5만 당원은 물론 한국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노동자, 농민, 빈민들로부터 나오는 거죠. 시행착오를 줄이면서 효율적으로 당을 운영한다면 당은 더 강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원내 진출 자체는 엄청 감격스럽지만 지금 제 머리 속은 4월15일보다 오히려 이후 8년 후에 가 있습니다. 더 흥미진진할 겁니다. 이건 지도 보고 가는 길이 아니니까요.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총선 이후에 엄청난 항의전화가 당으로 올 겁니다. ‘왜 이제 나타났냐고’.”


온건개혁파가 보수를 대변하는 사회

이번 총선은 단지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 가능성 뿐 아니라 3김 시대 이후 첫 국회의원 선거로, 한국 정치지형의 변화를 초래한다는 점에서도 여느 총선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지금까지는 지역주의 정당이 거대당을 구성해 왔는데 이제는 지역당을 어느 정도 탈피하면서 온건보수를 지향하는 열린우리당이 전국 규모에서 과반을 차지하는 굉장히 파워풀한 제1당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길게 보면 61년 군사쿠데타 이후 강력했던 영남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이 바뀌게 되는 겁니다. 이건 의회권력의 교체이자 지역주의의 쇠퇴를 의미합니다. 영남을 근간으로 하던 수구강경파들이 보수를 대변했다면 이제는 온건개혁파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한국 자본주의의 요구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면 온건보수와 수구보수간의 대립전선과 함께 민주노동당과 집권당과의 전선도 함께 쳐진다는 것이죠. 현상적으로는 전자가 더 주된 전선이 되겠지만 우리가 제1야당이 되면 전선은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싸움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전략적으로 한나라당을 공격하면서 야당교체론, 진보야당론을 내걸어야 합니다.”

‘야당교체’는 민주노동당의 총선 슬로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이 민주노동당 의석과 합했을 때 과반이 되는 상황 등이 온다면 수구정당과의 전선에서 자칫 차별성, 진보성보다는 다수당(열리우리당) 뒤치닥꺼리에 정체성이 훼손다는, 심지어 ‘이중대’가 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곤혹스런 지적입니다. 하지만 민주당이나 자민련이 독자생존하기 어렵기 때문에 설사 열린우리당이 선거 결과로만 과반이 안된다고 하더라도 (여당 프리미엄 등을 감안할 때) 결과적으로 과반이 될 겁니다. 우리가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은 적습니다. 그리고 온건개혁파가 보수진영 전체를 대변하게 되면 우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당교체는 괜찮은 구도입니다.”

노 본부장 말처럼 야당교체를 위해서라도 이번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지지를 최대한 끌어내야 한다. 그런데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을 기치로 내건 민주노동당의 정책 공약은 많은 선호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 지지도는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복잡하면서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정당들이 정책, 이념정당이 아니다보니까 어떤 정책도 소화가능한, 그런 정치환경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한 시민단체 조사를 보니까 열린우리당 지지자인데 정책선호도에서는 민주노동당 지지로 나온다 이겁니다. 좋아하는 정책이 고정불변이라면 이 사람에게 민주노동당은 과격하거나 현실적인 집단인 거죠. 본질과 달리 부드럽게 가자는 얘기는 아니지만 정책이미지와 다른 투쟁일변도의 민주노동당 이미지가 각인돼 있다면 그 차이를 극복해 내는 것도 우리의 과제이죠.”


조직노동자를 정치적으로 재조직해야

단지 일반 국민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민주노총 소속인 KBS노조 조합원 설문조사에서는 열린우리당 지지가 민주노동당보다 더 높게 나오기도 했다.

“정지된 단면만 놓고 얘기하긴 어려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정치적 단결은 정치적 재조직화 과정입니다. 노조로의 조직화가 정치적으로 곧바로 전환하는 건 아니죠. 단지 중산층 의식, 지역주의만으로 평가하긴 어렵구요, 민주노동당의 활동을 확 받아들일 만큼 확신을 주고 있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외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조직된 노동자가 100% 노동자 정당을 지지하지는 않아요. 영국노총(TUC)이 만든 노동당의 경우도 TUC 조합원의 60% 지지를 받았던 게 최고치입니다. 우리는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 최근 전교조나 공무원노조의 지지 선언 등 조직노동자들의 민주노동당 지지는 계속 확산되고 있습니다.”


정치운동과 노조운동, 새로운 로드맵 짜야

노동자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은 노조운동에도 일정한 변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 출신의 국회의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직노동자들을 기반으로 한 정당을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올 총선의 경험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당장 10명의 의원이 생겼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하루 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헌법기관인 국회라는 공간을 전술적으로 활용해 10명의 힘을 100명, 1,000명의 것으로 만들어 여론을 조직하고 변화를 끌어내는 활동을 해야죠. 노조운동에도 상당한 교섭력의 강화를 가져오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이제 문제는 당과 노조운동 조직이 어떻게 역할을 조정하고 교류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당장 현안 문제인 비정규직의 임금, 근로조건, 고용에 있어서 차별 문제를 포함해서 노사관계로드맵 등 현안은 많다. “노조운동, 노동자 개인의 노동과 삶에 영향을 미치는 각종 입법사항, 입법저지사항, 정치적 작용 등과 관련한 우리의 로드맵을 짜야 합니다. 종합전쟁계획을 짜듯이 포병, 보병, 미사일부대 등의 역할을 분담해야 합니다. 민주노총과는 정례협의회를 상설화하고 조정기구 같은 것을 만들어 경중완급을 조절해서 당과 민주노총의 교섭력, 정치력이 고르게 발휘되면서 시너지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해나갈 것입니다.”

그런 그는 특히 비정규직의 문제를 강조한다. “2005년 5월1일을 비정규직 총파업의 날로 선포하고 앞으로 일 년 동안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이 앞장서 총파업을 홍보하고 조직해야 한다고 봅니다. 의원 몇 명의 입법활동이 아니라 대중들의 참여와 투쟁이 있을 때만이 비정규직 철폐입법을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마치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위한 120년 전 노동자들의 투쟁처럼, ‘비정규직 철폐’가 민주노동당과 하나로 여겨지게끔 할 계획입니다.”

노회찬
● 56년 부산 출생
● 82년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 취득
● 87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창립
● 89년 인민노련 사건으로 구속
● 93~98년 진보정당추진위, 진보정치연합 대표
● 93~2003년 <매일노동뉴스> 발행인
● 97~98년 국민승리21 기획위원장
● 2000~2002년 민주노동당 부대표
● 2002년~현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선거대책본부장

이정희 기자(goforit@labo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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