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노동자의 죽음을 접한 이튿날인 금요일 오후, 창원시내를 빠져나와 마산만을 끼고 20여분 달려 도착한 두산중공업. 130만평 광활한 대지 위에 자리잡은 회사는 마산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무거운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기계소리마저 멈춰버린 공장 건물들을 지나자 단조공장과 터빈공장이 마주보고 있는 노동자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 노동자광장에서 보일러 공장으로 빠져나가는 길 한 켠에 고 배달호 조합원이 아직 차디찬 시멘트 바닥 위에 누워 있었다.

주검 주위에 출입을 금지하는 줄이 쳐져 있는 상태에서 대책위원회가 시신의 손상을 막기 위해 드라이 아이스로 채워진 스티로폼으로 임시 관을 만들어 시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시신 주변에 늘어선 하얀 천막들 앞으로 영정이 모셔진 무대가 설치돼 있었고 무대 앞에서 금속노조 두산중공업지회 조합원과 지역 노동자들은 회사에 대한 거친 분노를 뿜어내고 있었다.

* 다시 일어서는 조합원들

"돌아가시기 이틀 전 아침에 뵀는데 '김 부지부장은 요새 무슨 낙으로 사나, 내는 사는 낙이 없다' 그러셔서 내가 '오늘만 있는 게 아니라 내일도 있으니까 힘을 내자'고 말씀드렸는데, 그게 마지막 모습이 됐다." 농성 천막에서 만난 두산중공업 출신인 금속노조 경남1지부 강대균 부지부장은 눈시울을 붉히며 파업 철회 이후 얼어붙은 현장을 가슴아파하던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회상했다.

고인과 같은 공장 출신으로 함께 노동운동을 하면서 호형호제하던 김창근 금속노조 위원장도 "차라리 내 멱살을 잡고 상황이 이렇게 되도록 뭐했냐고 욕이나 한번하고 갔으면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는 않을 것 같다"고 동지를 잃은 슬픔을 토해 냈다.

노동자광장에 모인 조합원들은 전날 300여명에서 이날 1차 추모집회에는 800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지난해 파업과 대량 징계, 그리고 이어진 손해배상소송과 가압류 등으로 움츠러든 조합원들이 배달호 조합원의 죽음으로 서서히 일어서고 있었다.

한 노조 간부는 "우리가 오늘 같은 모습을 조금만 일찍 보여줬어도 달호 형님 안 보낼 수 있었는데…"하며 아쉬워했다. 원자력공장 한 대의원은 "조합원들이 회사눈치를 보느라고 쉽게 나서지 못했던 것뿐이지 마음은 다 똑같다. 오늘은 '회사를 떠나서 인간적으로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우리공장 조합원 전체와 함께 참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집회가 끝난 저녁 무렵. 시신사수를 위한 철야농성이 진행된 노동자광장에는 전 조합원 집결지침에도 불구하고 많은 조합원들이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합원들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 민영화 이후 회사의 현장통제의 그림자는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 질식할 것 같은 현장통제

터빈 공장 한 조합원은 "며칠 전 점심시간에 10분 늦게 들어갔더니 반장이 디게 뭐라 합디다. 민영화 이후에 제일 달라진 게 중간관리자들의 현장통제가 심해진 것"이라고 전했다.

조합원들은 회사가 중간관리자인 직장과 반장들에게 '날개를 달아줬다'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같은 조합원이고 예전에는 노조활동에도 협조적이던 현장관리자들이 회사의 현장통제에 적극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다.

지회 김수용 편집부장은 "민영화된 이후 현장관리자들의 권한이 강화되고 이들에 대한 노무교육이 실시됐다"며 "이들이 조합원들을 직접 접촉하면서 노조와 조합원들의 관계를 벌여놓고 노조 뿌리를 약화시키는 작업을 진행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 부장은 또 "말을 잘 안듣고 노조활동을 열심히 하는 조합원들은 연장근무와 휴일근무도 안 시키는 등 작업장에서 다른 조합원들과 분리시키려고 노력해 왔다"며 "사실상 노조 활동가들이 왕따를 당하면서 노조조직이 현장에서 무력화 됐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현장통제 강화의 이면에는 회사의 일관된 대 노조 강경정책이 자리잡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예전 공기업 시절에는 회사가 강경한 입장을 보이다가도 임단협 마무리에 모든 것을 다 풀어주니까 중간관리자들이 회사보다는 노조편을 많이 들었다"며 "민영화 된 이후 노무관리가 변한 것은 중간관리자들이 회사입장을 믿고 흔들리지 않는데 있다"고 말했다.

결국 회사는 지난 47일 파업기간에 대해서도 무노동무임금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무단결근 처리를 했으며 파업 이후에도 해고 18명을 포함한 대량징계와 63명에게 53억원이라는 개인 가압류 등 공기업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경일변도 정책을 고수했다. 이런 상황에서 파업참가 조합원들이 감수해야 했던 임금손실과 공장별로 할당된 본보기식 징계는 조합원들의 마음을 더욱 얼어붙게 만들었다.

53억원에 이르는 가압류는 노조 조합비에 대한 가압류를 배제하고도 개인당 약 4,000여만원에 이르는 액수다. 배달호 조합원도 지난 5월 파업과 정직 3개월로 6개월동안 거의 임금을 지급받지 못한데다 그나마 지급된 일부 월급에서도 220만원이 가압류된 상태였다. 더구나 고인이 살아있었다면 앞으로도 3,000여만원 이상이 더 가압류당해야 하는 것이다.

김수용 편집부장은 "임단협 타결 이후에도 회사가 노조와 협상을 통해 가압류 문제를 풀려고 하기보다는 개인들에게 각서나 반성문 등을 요구해 왔다"며 "임단협 합의 이후에도 계속된 회사의 노조탄압이 배달호 조합원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말했다.

* 그가 '노동자광장'을 선택한 이유

이날 저녁 공장에 어둠이 드리우고 농성천막 주변 모닥불에 모여 앉은 조합원들은 고인에 대한 그리움과 회사에 대한 울분을 뒤섞어 쏟아놓고 있었다. 유일하게 평조합원 신분으로 해고됐고 고인과 함께 수배생활을 했던 박영기 조합원(27)은 "웃는 모습이 어린애 같고 사심이 전혀 없는 분이었다"고 고인을 회상했다. 박 조합원은 해고생활의 어려움을 묻자 "그래도 난 숨은 쉬고 있으니까 행복하다"며 끝내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문상을 마치고 돌아서던 한 대의원도 "아무 말 못하고 싹싹 빌고만 왔다"며 "영정을 볼 낯이 없다"고 자괴감을 드러냈다.

한 조합원은 "처음 민영화될 때는 조합원들이 자주 찾던 인근 횟집들에서 두산이 만든 술을 가져다 놨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제품으로 다시 바꿨다"며 "이제 두산은 지긋지긋하다"고 조합원들 분위기를 전했다. 그 조합원은 "조합원들이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회사가 좋아서라기 보다는 회사가 노조 활동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철저히 파악해 불이익을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고인이 분신한 노동자광장은 조합원들의 왕래가 가장 많은 길이다. 회사 출근버스는 단조공장 앞 노동자 광장에서 조합원들을 내려주고 각 작업장으로 흩어진다. 점심시간에는 그 길을 따라 터빈공장 3층에 위치한 식당으로 가고 퇴근버스를 타기 위해서도 그 길을 지나쳐야 한다.

또한 노조의 선전활동이 주요하게 이뤄지는 곳이자 노조 집회가 열리는 곳이다. 파업이 한창일 때는 조합원들의 집결을 막기 위해 출퇴근 버스가 일부러 노동자 광장을 피해 개별 작업장 앞에 조합원들을 내려주기도 했다.

"경찰이 '회사에 항의할 거면 본관 앞에서 분신하던가 하지 왜 하필 여기냐'고 하데요. 그건 이 길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소립니다" 조합원들이 생각하는 '그 장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노동자광장에서 고인이 근무하던 보일러 공장으로 가는 방향에 있었다. 보일러 공장은 김창근 금속노조 위원장 등 많은 노조 간부들을 배출했으며 노조 활동도 제일 활발하던 공장이다.

"조합원들은 달호 형님이 우리한테 무슨 말하고 싶었는지 다 알 겁니다. '매일같이 내 시신 밟고 다니면서 우리 공장부터 조직하고 노조를 살리라'고 말하고 있는 거죠."

김재홍 기자(jaehong@labo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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