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 과정에서 죽음을 당한 노동자들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권한부족과 조사기한 만료 등으로 인해 진실의 문을 눈앞에 두고 멈춰 섰다.

지난달 16일 활동기간이 만료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4일 노동자 의문사 10건에 대한 최종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문영섭 사건과 오범근 사건 두건만이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인정됐을 뿐 기각 1건과 취하 1건을 제외한 나머지 6건은 조사기한 만료와 권한 미비로 진상규명 불능 판정이 내려졌다.

공권력 개입을 인정받은 문용섭씨의 경우 지난 88년 광무택시 노동자로 근무하던 중 구사대의 폭력에 의해 사망했으며 당시 검찰은 회사 관리부장이 폭력을 사주한 사실을 인지하고도 이를 은폐해 단순폭행사고로 처리했다. 또 같은 해 후지카대원전기 구로공장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하다 회사의 구사대 폭력이 부당함을 호소하던 중 음독 자살한 오범근씨의 경우도 진상규명위원회는 "구로경찰서가 구사대 폭력을 인지하고도 이를 방관해 오씨를 자살에 이르게 했다"고 결론지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당시 노동현장에서 발생한 인권유린과 억압적인 노사행정, 사용자편에 기울어진 경찰관행 등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며 이들의 죽음에 대해 국가에 책임이 있음을 인정했다.


* 관련기관 압수수색, 구인 모두 불가능

그러나 나머지 사건들에 대해서는 조사권한 부족과 조사기한 만료로 더 이상 진실에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국정원(당시 안기부)나 기무사, 보안사 등이 당시 노동자들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진술이나 정황 증거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들 기관들의 비협조로 인해 물증을 확보하는데 실패했다.

지난 91년 구속된 상태에서 병원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박창수 전 한진중공업노조위원장의 경우 구속 이후 안기부가 전노협 탈퇴를 종용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국정원 방문조사에도 불구하고 국정원의 비협조로 인해 당시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 더구나 당시 박창수 전 위원장을 담당했던 안기부 부산지부 홍 아무개 씨에 대한 진술서도 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이 만료된 지난달 16일 오전에 도착해 더 이상 추가조사를 진행할 수 없도록 했다.

또한 정경식 사건에서 방위산업체 노동자 동향을 감시하던 보안사 활동, 박태순 사건에서 노동현장에 취업했던 학생운동가를 감시해온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 신호수 사건에서 민간인에 대해 용공공작을 벌인 경찰서 대공과 행위 등도 확인됐지만 억울한 죽음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입증하지 못했다.

구인권 부재도 한계로 작용했다. 문용섭 사건의 경우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명 아무개 검사가 회사의 사주를 인지하고도 단순폭행치사로 처리했다는 구사대원의 증언을 확보해 공권력 개입을 인정했지만 명 검사는 한번도 조사에 응하지 않았으며 이에 대해 진상규명위는 과태료를 부과하는 선에서 그쳐야 했다. 또한 이재호 사건도 당시 노조를 탄압하던 기업주가 3차례의 출석요구 불응했지만 진상규명위가 구인권을 갖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추가조사가 불가능했다.


* 한 발자욱 앞에서 멈춘 진상규명

김준곤 상임위원은 "압수수색권과 구인권이 없는 위원회로서는 외부세력의 개입이 분명한 사건에 대해서도 증거를 포착할 수 없었다"며 "한발자국만 더 나가면 진실을 밝힐 수 있었다"고 아쉬워했다. 또한 "이처럼 한계가 있는 법을 만든 정치권이 진상을 규명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이 든다"며 정치권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노동현장에 대한 공권력의 부당한 개입은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진상규명위의 한계가 더 크게 다가오고 있다. 올해 제주 한라병원과 지난해 한국시그네틱스에서는 용역업체의 불법행위와 구사대 폭력이 발생했지만 경찰은 현장에서 폭력행위를 목격하고도 이를 방관했다. 민주노총은 "10년 전 의문사를 가져온 현실이 지금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며 "의문사 진실규명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공권력 개입을 인정받은 문영석씨의 아내는 사건후유증으로 파킨슨씨병과 정신질환을 앓아 현재 거동이 불가능하다. 진실규명 불능 판정을 받은 이재호씨의 부친은 아들의 억울한 죽음에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더구나 가슴에 아들을 묻은 어머니들과 가족들이 아직도 국회 앞에서 노숙을 하며 진상규명위의 권한 강화와 기간 연장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이들의 아픔에 국회가 응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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