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8월11일 오전 2시. 1천여명의 경찰이 야당인 신민당 당사 현관을 부수고들어갔다.

신민당사 4층에서는 와이에이치(YH)무역 노조원 187명이 회사쪽의일방적인 ‘공장폐쇄’ 에 반대해 ‘회사정상화’를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고있었다. 경찰은 폭력을 휘두르며 이들을 강제연행했고, 이 과정에서 노조상무집행위원 김경숙이 4층 창문에서 떨어져 숨졌다.

스물두살의 어린 나이로 삶을 마감한 김경숙의 성장과정은 70년대 여성노동자의전형적인 모습이었다. 8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신 뒤 어머니의 날품팔이로간신히 초등학교를 마친 김경숙은 돈을 벌기로 결심하고 정든 고향을 등진 채서울로 떠났다.

서울은 김경숙이 꿈꾸었던 서울과 너무도 달랐다. 하청공장에 취직해 코피를쏟으며 밤낮없이 일했지만, 봉급을 3개월치나 못받기도 했다. 겨울에는 추위에허덕이며 5원짜리 풀빵 6개로 하루 끼니를 채워가야만 했다. 하청공장의경영부실로 이 공장, 저 공장을 전전하면서도 당시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그랬듯이3개월마다 5∼6만원씩을 모아 고향집에 보내곤 했다.

76년에 김경숙이 입사한 와이에이치무역은 가발수출업체로서 가발 경기호황과수출진흥정책에 힘입어 1970년 12억7천여만원의 순이익을 올리는 등 급성장했지만, 무리한 사세확장과 해외진출, 부정한 경영 등으로 인해 70년대 중반부터 급속도로내리막길을 달리게 된다. 결국 1979년 3월 경영진은 ‘공장폐쇄’ 를 계획했고, 노조는 이에 격렬히 반발했다. 노동자의 땀을 짜서 남긴 이윤만 챙기고 노동자들은내팽개치려는 경영진의 음모에 분노했던 것이다.

70년대 다수의 여성노동자들은 체제의 지배에 순응적이기도 했고, ‘공순이’ 라는사회적 조소를 내면화시켜 자기비하와 열등감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채우기도 했다. 그러나 김경숙을 비롯한 적지 않은 수의 노동자들이 야학과 노조활동, 소모임 등의문화적 경험공유를 통해 노동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자기 삶의 조건을 스스로바꾸길 꿈꾸는 ‘노동계급’ 이 되었다.

노조활동 속에서 김경숙은 더 이상 나약한 ‘공순이’ 가 아니었다. 기숙사농성에서 혈서를 쓰며 회사의 정상화를 촉구했고, 특유의 큰 목소리로 결의문을읽으며 동료들의 투쟁의지를 고양시켰다. 지루한 농성장에서는 ‘진주낭군가’ 를부르며 흥을 돋우기도 했다고 한다. ‘근로기준법’ 과 ‘사회 정의’에 기대어부당한 현실을 고발하고 자신들의 권익을 찾고자 했던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의 길끝에는 유신체제 몰락의 도화선이 된 김경숙의 죽음이 살아있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