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이 지난해 11월 펴낸 ‘중대재해 사고백서 : 2023 아직 위험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책을 최근 다시 읽었다. 업무 때문에 보기 시작했지만 참 잘 만든 책이라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중대재해 원인조사’ 결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전향적이다. 일반에 그 내용이 공개되지 않아 ‘깜깜이 보고서’라는 비판을 받아온 정부의 중대재해조사 결과가 전문가들의 손을 거쳐 세련된 형태로 다시 태어났다. 진작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무사안일> 여덟 번째 사연은 정부의 재해조사와 그 보고서에 관한 이야기다.

산재예방 목적 상실한 재해조사의견서

노동자가 사망하는 등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고용노동부 장관은 산업안전보건법 제56조와 같은 법 시행규칙 제71조에 따라 사고원인을 규명하거나 예방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중대재해 원인조사’를 시행할 수 있다. 실무적으로는 안전보건공단 직원들이 ‘재해조사의견서’를 작성해 노동부에 보고하면, 특별사법경찰인 노동부 근로감독관들이 이를 바탕으로 수사를 벌여 ‘수사의견서’를 작성해 검찰에 송치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검찰은 노동부 수사의견서를 바탕으로 공소장을 작성해 기소한다. 따라서 중대재해조사 첫 단계에서 마련되는 재해조사의견서는 사건의 수사방향을 정하는 핵심자료가 된다.

이에 정부는 재해조사의견서를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 기소 전 관련 내용을 공개할 경우 형법 제126조 피의사실 공표에 해당할 수 있고, 각종 추측성 보도와 고인‧유족에 대한 명예훼손 논란으로 공정한 수사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실제로는 기소가 완료되고 법원 판결이 이뤄진 뒤에도 특정 기업이나 사업주에 관한 민감 정보가 포함돼 있다는 이유로 해당 자료가 공개되지 않는다. 언론이나 전문가도 국회의원실의 자료제출 요구를 거치지 않는 이상 자료를 구해볼 수 없다.

결국 재해조사의견서는 검사가 기소 여부를 판단하는 자료로 사용된 뒤 사장되는 현실이다. 기소 판단 요건인 실정법 위반 여부에 치중해 의견서가 작성되다 보니, 재해 원인에 대한 심층적인 접근도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정이 이러니 실효적인 예방대책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노동자 사망을 동반하는 중대재해 가운데 비슷한 유형의 재래형 사고가 반복되는 이유다.

수사 공정성 vs 중대재해 예방 … 무엇이 더 중요한가

산재예방 목적을 상실한 정부 중대재해조사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건 당연한 결과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전후해 노동안전보건단체 활동가들은 정부에 재해조사의견서 공개를 요구해왔다. 이미 많은 논객들이 <매일노동뉴스> 지면을 통해 재해조사의견서 공개 필요성을 설파한 바 있으므로 이 글에서 같은 논의를 반복하지는 않기로 한다.

다만,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을 때 얻어지는 편익과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얻어지는 편익을 따져볼 필요는 있다. 수사의 공정성 확보가 더 중요한지, 국민 알권리 보장을 통한 산재 예방효과 확보가 더 중요한지 판단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이와 관련해 노동부는 지난 2022년 11월 발표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에서 “중대재해 발생원인이 담긴 재해조사의견서를 공개하고 사고발생부터 수습까지의 과정, 기업 문화, 안전보건관리체계 등 구조적 문제까지 분석한 중대재해 사고백서를 발간하여 중대재해 예방을 위한 공적자원으로 활용되도록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적어도 정부정책의 방향은 정해진 셈이다.

‘중대재해조사 공개’ 계류법안의 운명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후 경영계는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다”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왔다. 맞는 말이다. 처벌은 사후적 조치이고, 처벌보다 중요한 건 예방이다. 그러니 재해조사의견서를 공개해 중대재해 예방을 위한 공적자원으로 활용하겠다는 정부의 정책방향은 경영자와 노동자 모두의 이익에 부합한다.

이와 관련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이 각각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노 의원은 중대재해조사 시행 후 보고서를 작성해 3개월 내 공표하도록 했다. 임 의원은 동종‧유사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재해 발생의 기술적 원인과 재발방지대책 등을 공소가 제기된 이후 공개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21대 국회 회기가 끝나는 5월 말까지 처리되지 않으면 이들 법안은 자동으로 폐기된다. 총선이라는 정치권 최대 이벤트가 마무리되는 대로, 여야는 노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해당 법안을 즉각 처리해야 할 것이다.

한편, 지난 2020년 인제대 산학협력단이 안전보건공단 의뢰로 진행한 ‘재해조사 보고서의 질적 제고를 위한 방안 연구’에서 공단 차장급 이상 24명과 노동부 근로감독관 4명을 면담한 결과, 응답자 모두 중대재해보고서 공개에 부정적이었다. 이들은 “재판에서 다툼의 소지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공단직원과 근로감독관 모두 책임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조사인력이 위축된 상황에서 양질의 보고서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사결과가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

예쁜 오답노트에서 업종별 오답노트로

필자가 속한 일환경건강센터는 지난 21일 ‘재해조사 공개, 처벌을 넘어 예방으로’라는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다. 공적으로 수행되는 중대재해조사 결과를 처벌 목적으로만 이용할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공개해 기업들이 재해예방의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마련한 자리다. 지난해 노동부‧안전보건공단이 펴낸 ‘중대재해 사고백서 : 2023 아직 위험은 끝나지 않았다’ 집필과정에 참여한 공단 관계자 등이 토론자로 참여했다.

“영화에서 보면 사람을 흙구덩이에 파묻어도 잘 안 죽잖아요. 그런데 붕괴사고가 나면 왜 그렇게 처참하게 죽을까요. 물리공식 F(힘)=m(질량)×a(가속도)를 생각하면 됩니다. 산꼭대기서부터 빠르게 무너져 내린 흙의 덩어리가 엄청난 충격으로 사람을 때리는 거예요. 그런데 알고 보니 산이 아니라, 기업이 불법으로 적재한 폐기물 더미였어요. ‘붕괴사고로 사람이 죽었다’는 설명으로는 사고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는 거죠. 재해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포럼에 참석한 공단 관계자의 말이다. 재해조사는 사고의 ‘원인의 원인’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 조사결과가 재해발생 사업장 사업주들에게 면죄부로 작용하는 현실을 우리는 익히 보아왔다. 예방은커녕 처벌효과도 없는 휴지조각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부와 공단의 중대재해 사고백서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재해조사 결과 공개를 위한 법적 근거가 미비한 상황에서도 피의사실 공표 우려를 불식시키면서 충분히 훌륭한 보고서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전문가로 구성된 편찬위원회와 방송작가로 구성된 집필진의 협업으로 읽기 쉽고 보기 좋은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보고서 편찬과정 자체를 우리나라 안전보건행정의 진일보 사례로 평가할 만하다.

▲ 구은회 일환경건강센터 PL
▲ 구은회 일환경건강센터 PL

다만, 이번 보고서는 알록달록한 볼펜으로 예쁘게 써내려 간 오답노트 같다는 인상을 준다. 현재의 보고서 수준을 앞으로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조금 투박하더라도 필요한 정보가 필요한 곳에 더 많이 전달될 수 있도록 ‘업종별 오답노트’ 방식의 접근이 유용해 보인다. 현장의 전문가인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시스템 마련도 필요해 보인다. 모쪼록 이번 백서 발행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더욱 쓸모 있는 보고서 발행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일환경건강센터 PL (tokki79@hanmail.net)
 

▲ 일환경건강센터가 지난 21일 '재해조사 공개, 처벌을 넘어 예방으로' 라는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다. <구은회 일환경건강센터 PL>
▲ 일환경건강센터가 지난 21일 '재해조사 공개, 처벌을 넘어 예방으로' 라는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다. <구은회 일환경건강센터 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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