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산업노동연구> 30권 1호에 게재된 ‘영국 노동조합의 조직화 전략과 조직 변화: 조직화와 관리주의의 동거?’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편집자>

▲ 유형근 부산대 교수
▲ 유형근 부산대 교수

민주노총의 전략조직화 사업이 지난 20년간 계속됐고, 최근 주요 산별노조들은 자체적인 조직화 사업을 본격화했다. 한국에서 조직화 사업의 주요 주체가 산별노조로 이동하면서 조직화 사업에 따른 노조조직 변화의 해법을 고민하고 조직 혁신의 방안을 마련하는 일이 중요해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 글은 우리보다 앞서 조직화 사업에 따른 조직 변화를 경험한 영국의 주요 노조의 사례를 살펴보고 시사점을 얻고자 한다. 영국에서 조직화 전략은 1998년에 영국노총(TUC)이 설립한 ‘조직화 학교’에 여러 가맹노조가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확산했다. 이 글에서는 유나이트(Unite)·유니슨(UNISON)·지엠비(GMB)·소매유통업노조(Usdaw) 4개 대형노조의 사례를 탐구한다.

영국 주요 노조의 조직화 전략

4개 노조의 조직화 전략과 사업 실천을 종합해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발견됐다. 첫째, 조직화 사업의 양상은 노조별로 다양했다. 유나이트는 조직화 사업을 전문적 분야로 분리했다. 이에 비해 지엠비·소매유통업노조·유니슨은 오히려 그것을 기존 전임간부의 주요 역할로 통합하거나 업무 재조정을 꾀했다. 둘째, 조직화 사업실행 단위도 조금씩 달랐다. 유나이트는 중앙의 전담 부서가 중심이 돼 전체 사업을 실행하고 관리했다. 이에 비해, 유니슨과 지엠비는 주된 실행 단위가 지역본부였다. 소매유통업노조의 경우 중앙이 계획한, 대규모 소매업 체인에 집중한 조합원 모집 사업을 전 조직적으로 벌였다.

영국 노조의 조직 변화와 ‘관리주의’ 도입

이처럼 영국의 주요 노조 조직화 사업은 매우 다양하게 이뤄졌다. 그런데 우리의 논의에서 중요한 지점은, 조직화 전략을 추진하면서 모든 노조가 급속한 내부 조직 변화를 도모했다는 점이다. 4개 노조 모두에서 나타난 조직 변화상의 공통점은 중앙 지도부가 주도하는 ‘관리주의’(managerialism)가 새롭게 등장해 발전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관리주의는 영리기업의 관리·경영 지식이나 관행에 근거해 조직이 운영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돼야 한다는 담론, 이데올로기, 그리고 이와 연관된 실천과 관행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특히 조직화 사업을 전임간부의 일상 업무로 통합시킨 두 노조(지엠비·소매유통업노조)에서 관리주의적 조직 변화가 급격했다. 두 노조에서는 성과관리 시스템이 도입돼 간부의 조직화 활동 계획 수립 및 평가 과정에 전면 적용됐다. 이를 통해 지엠비와 소매유통업노조는 조합원 모집의 단기적 목표와 그에 따른 성과를 월·분기·연 단위로 모니터링하고, 이에 기초해 개별 간부의 성과를 평가했다. 중앙집권적 통제하에 조직화 사업의 효율성을 높여갈 수 있었다. 유니슨도 성과관리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런데 유니슨에서는 성과관리에 대한 조직 내 수용성은 두 노조에 비해 다소 약한 편이었다.

영국의 노조에서 발견된 관리주의의 요소를 정리하자면, (1) 중앙집중적 관리의 강화, (2) 목표 설정·모니터링 및 평가까지 전 과정을 통합한 성과관리의 체계화, (3) 전임간부의 관리자로의 변화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관리주의의 적용은 노조 운영의 합리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조직화 사업이 마치 매출 극대화를 목표로 한 기업 경영과 유사한 형태로 변모하는 과정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왜 영국의 조직화 사업은 ‘기업의 경영방식과 유사한’ 조직 변화와 함께했을까?

현장 약화가 부른 성과·관리주의 조직화

조직화 전략과 관리주의 확산 간 연관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국 노조운동의 위기를 둘러싼 주체적 조건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조직화 사업은 영국에서 1980년대 이래 노조의 쇠퇴, 특히 사업장의 자발적 활동가(노조 현장위원) 감소와 그에 따른 현장 조직력의 약화라는 주체적 조건에서 추진됐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노조 대의원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현장위원이 1984년에 33만5천명에서 2004년 10만2천명으로 급감했다. 이에 따라 노조 지도부가 원하는 현장의 변화를 꾀하기에는 기층 활동가 기반이 너무 약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생존 위기에 처했던 노조 지도부는 중앙집권성을 강화해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투입함으로써 성과를 극대화할 방법으로 관리주의 도입을 선택했다.

결국 노조 중앙에서 아무리 훌륭한 조직화 전략을 세운다 해도, 그 실행을 위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튼튼한 현장위원 네트워크가 없다면 온전한 조직화 실행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 지도부는 활동가 육성과 조합원 참여라는 불확실한 기대보다 관리주의적 조직 변화라는 방향을 선택했던 것이다. 결국 사업장 노조운동의 활력 저하라는 조건하에서 조직화 사업을 추진한 영국의 노조는 관리주의에 의존하는 선택 말고는 현실적 해법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관리주의적 사업 방식이 강화되면 될수록 중장기적으로 노조조직의 기층은 능동적 참여 기풍이 쇠퇴하고, 이는 다시 상층 간부 주도의 관리주의에 의존하는 것을 심화시킬 우려가 크다. 영국의 많은 노조에서 조직화 사업이 실질적인 ‘노조 조직화’보다 간부에 대한 성과 압박에 의존하는 ‘조합원 모집 사업’으로 축소된 것은 이 악순환의 일면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영국의 노조에서 확산된 관리주의는 조직 확대의 양적 성과를 단기간에 거두는 데에는 쓸모가 있었지만, 중장기적으로 노조운동의 쇄신책이 되기는 어려웠다.

한국의 미조직 조직화 사업에 주는 시사점

그렇다면, 이상에서 살펴본 영국 노조의 사례는 한국 노조운동의 조직화 사업 추진에 어떠한 시사점을 주는가. 현장 조직력이 점차 약화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우회하거나 외면하는 형태로 조직화 전략을 추진하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힌다는 점이다.

한국의 산별노조에서도 사업장으로 내려갈수록 활동가 감소, 간부 기피 현상, 대의원의 역량 저하 등 노조조직의 기층을 이루는 현장의 조직력 약화가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 지 오래됐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집중적 사업의 성과로서 미조직 노동자들이 대거 노조에 가입한다고 하더라도, 신규 노조에서 새로운 노조 활동가들이 성장하지 못하거나 상급 단위의 지도력에만 의존하며 현장의 조직력은 취약한 상태로 머물 수 있다.

실제로 2010년대 이후 수많은 조직화 사업의 결과로 신규 조합원이 증가하고 노조 조직률이 최근 들어 상승했지만, 현장 조직력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동원’과 ‘참여’의 차원에서 조직화의 성과를 낙관하기는 어렵다. 영국의 노조는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 관리주의가 제시하는 해결책에 의존했다. 그렇다면 한국의 노조운동은 조직화 전략과 현장 조직력의 강화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노조 조직의 기층이 점점 무너지는 환경에서 미조직 조직화 활동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가. 이 질문이 한국의 노조운동이 영국의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논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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