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의 운영원칙 가운데 획기적이라고 할 만한 변화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사회적 대화기구의 성격을 합의기구가 아닌 협의기구로 규정했다는 사실이며, 두 번째는 노사중심성의 원칙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계층위원제를 도입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의 주관적 판단이다.

이제부터 시작할 이야기는 ‘사회적 대화=협의’라는 것이다. 사회적 대화를 협의(concertation)로 규정했다는 사실은 상식에 대한 도전이었다. 사회적 대화는 이해당사자 사이의 갈등을 사회적 합의(social consensus)를 통해 해소하는 걸로 인식했고, 또한 그것을 성과라고 평가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협의란 뭘까.

합의제 민주주의 위에 구축된 건축물

사회적 대화의 성격을 협의로 본다는 것은 사회적 대화가 합의제 민주주의(consensus democracy)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협의의 성격도 바로 이 합의제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규정된다.

합의제 민주주의와 관련해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미국 정치학회 회장을 지냈던 비교정치학자 아렌드 레이프하트(Arend Lijphart)다. 그는 민주주의의 유형을 의사결정 방식에 따라 다수결 민주주의와 합의제 민주주의로 구분한다. 너나없이 알듯이 다수결 민주주의란 다수결로 특정 사항에 대한 의결을 도출하는 방식이다. 단순하고 직설적이면서도 상당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고 매우 익숙한 방식이다.

다수결 원리가 민주주의의 기둥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다수결 원리가 절차적 정당성을 내세워 승자에게 권력을 집중하는 승자독식의 경향을 드러낸다면, 이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수 있다. 다수의 의지가 지배한다는 사실이 소수를 의사결정 참여에서 배제하고 패자집단으로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합의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단순 다수에 만족하는 것 대신에 (소수자까지 포용해) 지배하는 다수(ruling majority)의 규모를 최대화하려고 하는 민주체제”를 말한다.(레이프하트, 2016).

합의제 민주주의가 ‘다수의 지배’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합의제 민주주의는 ‘다수’를 넘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소수자와도 타협하고 조정함으로써 포괄적인 동의를 추구한다. 그리해 합의제 민주주의는 의사결정에 찬성하는 다수자의 규모를 극대화하는 방안, 궁극적으로는 만장일치에 의한 의사결정을 모색한다.

합의제 민주주의는 소수를 배제하기보다는 조정과 타협을 통해 포용하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다수결 민주주의와 날카롭게 대비된다. 만장일치 혹은 압도적인 다수를 추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소수자에게 거부권(minority veto)을 부여함으로써 소수자를 보호하는 기능을 갖는다. 이처럼 합의제 민주주의는 소수자에게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이해당사자 사이에 권력을 공유하고 분산한다.

“전통적인 지혜는 다수결 민주주의가 통치(governing)에는 더 우월하지만 합의제 민주주의가 대표성(representing)에서는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소수의견의 포용이라는 점에서 합의제 민주주의는 특히 소수집단과 소수의 이익을 대표하고 인민들과 그들의 이익을 포괄적으로 대표하는 데에 더 유리하다… 코포라티즘은 합의제 민주주의의 특징과 연계된다”(레이프하트, 2016).

사회적 대화는 현상과 대안에 대해 공유하는 이해(shared understanding)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합의는 그 결과의 하나일 뿐이다. 결과에서도 ‘의결’이라는 다수결의 원칙보다는 ‘만장일치’ 혹은 ‘다수안-소수안’과 같은 방식을 택해 소수파의 의견을 배제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합의가 아니라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소통과 조정 능력(정보의 교환, 설득과 주장, 양보와 조정 등)이다. 사회적 대화가 합의제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삼는다면 “합의제 민주주의의 본질은 실질적 정책 콘텐츠 그 자체보다는 그것이 창출되는 프로세스에 있다”라는 게 전남대에서 오랫동안 합의제 민주주의를 탐구해 온 선학태 교수의 지적이다(선학태, 2015).

 

소수자를 포용, 다수자의 규모를 최대로

사회적 대화가 협의 과정이라고 규정할 때 협의는 단순히 지속적인 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소수파를 포용해 합의에 이르기 위한 타협과 양보·조정의 과정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협의는 “의사결정에서 만장일치의 동의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모든 당사자의 이해를 충족시키기 위한 선의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협의란 다수의 의지에 따른 의사결정과 이렇게 결정된 의사에 대한 소수자의 강제적인 승복을 배제한다.

사회적 대화에서 참여 주체는 동의하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협의가 합의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협의는 합의를 위해 최대한 노력하더라도 그것을 필수로 여기지 않으며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어느 단계에서 ‘쿨하게’ 논의를 마감한다.

국제노동기구(ILO, 2013) 역시 사회적 대화를 협의로 규정하며 지속적인 대화에도 합의가 형성되지 않았을 때의 방안을 언급하고 있다.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협상의 의도지만 때로는 이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이해 당사자들의 견해가 크게 상충할 수 있는 탓이다. 그런 경우에는 최소한 협상 타결을 불가능하게 만든 문제, 다양한 당사자의 입장, 합의 영역 및 불일치 사항을 명백하게 기록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즉 당사자들은 “비동의에 동의”할 수 있으며, 이는 이후 단계에서 협상의 재개 가능성을 열어준다. 사회적 파트너가 협상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향후 재검토를 위해 ‘불일치 프로토콜(처리규정)’을 채택할 수 있다.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사회적 대화=협의’로 합의했다면 사회적 대화에서 합의가 아닌 협의의 역할은 무엇일까. 소수자를 포용하며 만장일치를 추구하는 협의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이 현실적으로 수용될 수 있을까. 더욱 중요하게는 이 합의 정신이 경제사회노동위원회법이나 그 운영에서 어떻게 반영됐을까. 협의기구에서 의결조항이 필요하기나 할까. 특히 민주노총은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는 협의기구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경사노위 법안에서 의결조항을 삭제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tjpark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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