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2022년 5월12일 가상화폐 테라와 루나가 폭락했다. 다음날 우리 언론은 ‘검은 목요일’이나 ‘리먼사태’에 빗대어 장송곡을 틀어댔다. ‘악! K코인 루나 하룻새 97% 폭락’(한국일보 20면), ‘루나 하룻새 97% 대폭락… 코인시장 검은 목요일’(중앙일보 B3면), ‘한국산 가상화폐 폭락… 코인판 리먼사태 오나’(조선일보 B2면)와 같은 제목으로 폭락 그 자체에 집중했다. 원인 분석 같은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폭락 후 나흘이 지났는데도 우리 언론은 투자자들의 분노를 고스란히 지면에 담아낼 뿐이었다. 경향신문 2022년 5월16일자 8면에 실린 ‘99.99% 폭락 루나·테라 투자자들, 분노 넘어 공포감까지’라는 기사가 대표적이다.

같은 날 동아일보는 34면에 폭락 사태를 ‘김치 코인의 몰락’이라고 훌륭하게 이름 지었지만, 원인 분석과 대안은 내놓지 못했다. 한국일보는 11면에 ‘루나·테라 쇼크 불 끌 방법이 없다’며 아예 대놓고 대안 없음을 고백했다. 한겨레는 19면에 ‘루나 폭락 사태에 손 못쓰는 당국’이란 제목으로 대책 못 세우는 금융당국을 비난하는 손쉬운 길을 택했다.

동아일보는 12면에 폭락에 임박해 싱가포르로 달아난 권도형 대표가 트위터에 쓴 글을 마치 인터뷰라도 한 듯 얼굴사진까지 곁들여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개발자 권도형 ‘내 발명품, 모두에 고통’”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매일경제는 14면에 ‘루나 쇼크로 세상 뒤집어 놓고… 권도형 잠적’이란 기사에서 도망간 권도형을 “한국판 일론 머스크라고 불리던 가상자산 업계 총아였다”고 보도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국민 대부분은 이름도 모르는 권도형을 ‘한국의 일론 머스크’로 이름 붙인 건 바로 한국 언론이었다. 언론의 후광을 업고 권도형은 더 기고만장했지만, 모든 언론이 권도형의 홍위병이었다.

가상화폐를 마치 ‘금 나와라, 뚝딱’하는 요술방망이인양 홍보기사를 써대던 우리 언론은 어떤 반성도 하지 않았다. 2022년 4월까지 한국 언론은 권도형에 미쳐 있었다.

조선비즈는 2022년 2월 6일 ‘단독’보도라는 딱지를 붙여 ‘카카오벤처스, 루나(LUNA) 코인으로 수백 배 평가차익 잭팟’을 터트렸다고 보도했다. 조선비즈는 “권도형의 테라에 투자한 카카오벤처스가 1천억 원 넘는 평가 차익을 얻었다”고 보도하면서 “암호화폐 자체에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금융당국의 감시망에 걸릴 위험이 있는 만큼, 벤처캐피털(VC)들은 당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코인에 투자하는 방법을 마련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당시 집권 문재인 정부가 암호화폐 대박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고 입장을 견지했다.

비슷한 시기 월간조선 2022년 3월호는 ‘문재인 정부가 5년간 고사시킨 한국 암호화폐’라는 장문의 분석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의 작은 제목은 ‘천재들이 선도하는 한국 블록체인, 발목 잡는 정부’였다. 권도형이 더 자유롭게 사기 행각을 벌이게 판을 키워주지 않은 문재인 정부가 무척이나 미웠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사기 행각을 방조한 문재인 정부가 잘했다는 건 아니다.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아랍에미리트,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까지 잘도 도망 다녔던 권도형은 지난해 3월 몬테네그로에서 위조한 코스타리카 여권으로 두바이로 가려다가 체포됐다. 몬테네그로 법원은 권씨를 한국으로 보낼지, 미국으로 보낼지 오락가락했다. 권씨는 경제범에게 유독 후한 한국행을 원했고, 미국은 미국대로 권씨를 미국 법정에 세우려 했다. 몬테네그로는 애초 미국 인도를 결정했다가 이를 뒤집고 한국에 보내기로 했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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