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싱글 인 서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조영훈 공인노무사(
조영훈 공인노무사(노무법인 오늘)

작가 지망생이던 영호(이동욱 분)는 호텔에서 알바를 하며 첫사랑 주옥(이솜 분)을 만났다. 하지만 남자들의 첫사랑이 다 그렇듯,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쁜 여자다. 첫사랑에 상처받은 영호가 십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우연한 계기에 다시 주옥을 만난다. 작가가 된 두 사람이 같은 컨셉의 에세이집을 한 출판사에서 쓰게 된 것. 그런데 둘의 책은 첫사랑을 언급하는 부분만 들어가면 자꾸 서로를 가리키며 묘하게 어긋난다.

가령 신인작가 영호가 쓴 책, 그러니까 영호의 기억은 이렇다. 1) 영호가 호텔 세탁실에서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있을 때, 첫사랑인 그녀(주옥)가 무슨 책을 읽느냐며 다가와서 먹던 아이스크림을 흘렸다. 2) 영호가 그녀의 집에서 길고양이에게 통조림을 줬고, 그녀는 그런 영호를 핀잔했다. 3) 영호는 자신의 습작을 그녀에게 보여줬으나 그녀는 관심이 없었다. 4) 이별 전 그녀는 영호를 바람맞히고 호텔 남자직원들과 회식을 갔다.

반면 소설가 주옥의 기억은 이렇다. 1) 주옥이 호텔 세탁실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고 첫사랑인 그(영호)가 옆에서 만화책을 읽었다. 그러다 주옥이 그에게 다가가다 아이스크림을 그의 만화책에 흘렸다. 2) 주옥이 자신의 집에서 길고양이에게 통조림을 줬고, 그는 그런 주옥을 핀잔했다. 3) 주옥은 자신의 습작을 인터넷에서 인정받고 있었으나 그는 관심도 주지 않았다. 4) 호텔 여자직원들과 회식이 있던 주옥에게 그가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 헤어졌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출판사 대표는 두 작가를 불러서 편집회의를 한다. 영호는 주옥에게 거짓말을 그렇게 할 수 있느냐며 글을 당장 고치라고 말한다. 반면 이미 유명한 소설가였던 주옥은 글쓰기란 원래 이런 것이라며 아마추어같이 왜 이러냐고 큰소리다. 출판사 대표도 유명작가인 주옥에게 글을 수정하라고 말하기 부담스러운 처지다. 누가 봐도 피해자는 영호고, 주옥은 예나 지금이나 나쁜 여자다.

책 쓰기를 그만 둘까 고민하던 영호는 자신의 책장을 뒤져 하루키의 책을 펼쳐본다. 그러다 발견한 놀라운 진실. 영호의 기억과 다르게 하루키의 책에는 아무리 뒤져도 아이스크림 자국이 없다. 반면 주옥의 글에 묘사된 바로 그 만화책을 펼치자 아이스크림 자국이 남아 있던 것. 나쁜 여자인 첫사랑에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던 영호는 자신의 기억이 왜곡된 것이었음을,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였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런 인식의 전환 뒤에 영호는 다시 글을 쓰고, 새로운 사람인 현진(임수정 분)에게도 마음을 열게 된다.

 영화 <싱글 인 서울> 포스터
 영화 <싱글 인 서울> 포스터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위 1)에서 4)까지의 쌍방 진술이 엇갈리는 쟁점 사항들 중 팩트는 여전히 1)만 확인됐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영호가 틀렸다는 반전에만 주목한다. 이렇듯 한 사건의 결정적 증거는 때론 다른 모든 사실관계들까지 확정 짓는 효과가 있다. 노사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노동위원회 쟁송에서도 이런 경우는 사실 흔한 것 같다.

하지만 2)에서 4)까지의 문제, 즉 누가 길고양이에게 무심했고, 누가 상대의 습작에 무관심했으며, 이별의 순간 누가 더 최악이었는지 등은 영화에서 하나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런 경우 진실은 대부분 중간 어디 쯤에 있지 않을까. 그래서 법으로 싸워 인용이든 기각이든 한쪽에 치우친 판정을 받았다 한들, 내가 전적으로 옳고 상대가 전적으로 그르다는 생각은, 또는 그 반대의 생각조차도 오만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객관적 증거라는 것도 결국 복잡한 사실관계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이 내리는 판단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

한편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본인이 틀렸다고 생각한 영호가 어찌 됐든 첫사랑의 덫에서 벗어나, 다음 스텝으로 옮겨 가게 됐다는 점이다. “너 많이 변했다? 꼭 서울 같아”(주옥) “나도 이제 변해야지”(영호)

때론 쟁송의 승패나 진실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는 것 같다.

공인노무사 (libero10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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