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전경.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외국 회사가 설립한 국내 법인을 하나의 사업장으로 보고 근로기준법을 적용할지에 관한 여러 건의 부당해고 소송이 대법원에서 심리되고 있어 관심이 쏠린다. 특히 국내 법인의 상시근로자수가 5명 미만일 경우 외국 회사의 사용자 해당 여부를 두고 상고심에서 첨예한 법리 공방이 예상된다. 국내 법인 사업장 상시근로자가 5명 미만이라도 외국 회사와 하나의 법인이라면 근로기준법을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사업(장)’ 판단기준을 새롭게 제시하면 국내에 진출한 다수의 글로벌기업의 근로형태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생길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법인 ‘독립 사용자’ 두고 엇갈린 하급심

11일 <매일노동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대법원 노동법실무연구회가 지난 5일 ‘외국기업이 설립한 한국법인 사업장에 대한 근로기준법 적용 여부 및 판단기준’을 주제로 진행한 토론회에서 이 같은 내용이 다뤄졌다. 박영재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사회를 맡고 최정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임상부교수가 ‘국제 근로관계에 대한 근로기준법 적용 관련 몇 가지 문제’를 발표했다. 현재언 서울동부지법 판사와 구교웅 변호사(법무법인 태평양)가 토론에 참여했다.

대법원에서 심리 중인 관련 사건은 총 4건이다. 모두 외국 회사 또는 해고 직원이 중앙노동위원회의 판정에 불복해 부당해고구제 재심판정취소 소송을 냈다. 노동위원회는 각 사건에서 “국내 법인은 한국 영업소 성격을 갖는 형식만 갖춰 독립적 사용자가 아니다”며 외국 회사가 인사·재정·영업 등에서 국내 법인을 지배하고 있는 ‘실질적 사용자’라고 판단했다.

근로기준법 ‘적용 범위’를 정한 조항이 소송의 쟁점이 됐다. 근로기준법 11조는 ‘상시 5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적용한다’고 정하고 있다. 세부적으로 △외국 회사와 국내 법인이 ‘하나의 사업장’에 해당하는지 △국내 법인이 상시근로자수 5명 이상에 해당하는지에 따라 법원 판단이 달라졌다.

국내 법인 상시근로자 ‘5명 이상’ 여부도 쟁점

각 사건의 하급심 판결은 엇갈렸다. 외국 회사 A사의 국내 법인 직원이 제기한 소송에서는 1심이 “미국 주법이 적용돼 대한민국의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지만, 2심은 “노동자가 일상적으로 노무를 제공하는 국가는 대한민국이므로 대한민국 근로기준법이 준거법”이라고 뒤집었다.

외국 회사 B사가 제기한 소송에서는 ‘5명 이상’ 여부에 따라 결론을 달리 했다. 1심은 “(외국 회사와 국내 법인이) 경영상 일체를 이루면서 유기적으로 운영되는 기업조직으로서 같은 사업장이 아니다”면서 5명 미만이라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2심은 경영상 일체를 이루는 하나의 ‘사업장’인 데다가 상시근로자 5명 이상이라 법 적용대상이라고 봤다. 외국 회사 C사 소송에서는 외국 회사와 국내 법인 모두 사용자이며 5명 이상 사업장이라며 회사 청구를 1·2심 모두 기각했다. 외국 회사 D사 소송에서도 외국 회사와 국내 법인의 업무 내용이 동일하다고 보고 국내 근로기준법 적용대상이라고 봤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법원 판단과 맥락이 비슷했다. ‘실질적으로 경영상 일체로 평가되는 하나의 사업장’ 여부에 관해 최정은 부교수는 “근로기준법 11조를 해석하는 데 국내 법인과 외국 회사를 달리 볼 이유가 없다고 본 법원 판단은 타당하다”고 분석했다. 법원은 “(국내 법인과 외국 회사를 다르게 본다면) 외국 소재 회사의 경우 본사 규모가 상당하고 대한민국 근로기준법이 준거법이 되더라도 국내에서 4명 이하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보호규정 대부분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결과가 돼 근로기준법 11조의 입법취지에 정면으로 반한다”고 판단했다. ‘장소적 독립’은 하나의 요소일 뿐 반드시 경영상 독립된 사업장이라고 볼 수 없다는 취지다.

전문가 “경영상 일체 이뤘다면 하나의 사업장”

최 교수는 ‘사업장’ 기준을 판단할 때 △사업의 목적 및 수행 방법 △인적·물적 조직체계 △제공된 설비의 사용관계 △인사교류 △구체적 지휘·감독관계 등을 종합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국내 법인의 ‘5명 이상’ 여부에 대해서도 유기적으로 경영상 일체를 이루는 하나의 사업장으로 운영됐다면 상시근로자 5명 이상이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교웅 변호사는 “해외 기업이 국내에 법인을 설립했고, 국내 법인에 고용된 상시근로자가 5명 미만이라면 근로기준법 11조를 적용해야 한다”며 “국제적으로 우리나라 법제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높이고, 외국 투자기업이 합리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기 위해서라도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함부로 이용한다는 사정이 없다면 법 적용을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결론에 따라 외국회사의 근로관계에 미칠 파장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하급심에서 근로기준법이 적용되는 ‘사업(장)’ 판단 법리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아 대법원이 외국 회사와 국내 법인의 ‘하나의 사업장’ 여부에 대해 첫 법리를 내놓을 가능성이 크다. 국제근로관계뿐만 아니라 모자회사나 계열사, 파견근로관계에서도 대법원 판단 기준이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최 교수는 “상시근로자수가 5명 이상인 사건에서도 사업의 목적 및 수행 방법, 인적·물적 조직체계, 제공된 설비의 사용관계가 어떠한지는 하급심만으로는 알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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