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퇴근 이후에도 공휴일과 야간에 집에서 장시간 업무를 보다가 뇌출혈을 일으켰다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재해자는 숨진 뒤에야 산재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근로복지공단이 사업장의 PC 기록으로 업무상 과로 기준을 형식적으로 판단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공단 “업무시간, 만성과로 기준 미달” 불승인

10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10단독(허준기 판사)은 숨진 전남도청 선임연구원 A(사망 당시 59세)씨의 배우자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불승인처분취소 소송에서 최근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공단이 항소를 포기해 지난달 1심이 확정됐다.

A씨는 2014년 2월부터 전남도청과 기간제 근로계약을 체결해 매년 연장하다가 2019년 1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다. 전남 발전계획 등을 연구했던 A씨는 하루 8시간(오전 9시~오후 6시)씩 주 5일 근무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러나 잔업과 야근이 잦아 퇴근 후에도 집으로 일을 가져와야만 했다.

과로가 쌓여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지 1년9개월 만에 쓰러졌다. 2020년 10월12일 근무 중 두통과 왼쪽 팔 감각 이상으로 구급차로 후송된 결과 ‘상세불명의 뇌내출혈’이 진단됐다. 두 차례 큰 수술이 이어졌다. 이에 A씨는 이듬해 4월 요양급여를 청구했지만, 공단은 5개월 만에 불승인 처분했다.

고용노동부 고시 ‘만성과로’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업무부담 가중요인도 없다는 이유였다. 공단이 산정한 A씨의 주당 평균 업무시간은 발병 전 12주와 4주간 각각 47시간2분, 42시간1분이었다. 노동부가 정한 ‘뇌심혈관 질환의 업무 관련성 인정기준’인 60시간(12주)·64시간(4주)에 한참 모자란다. A씨가 뇌출혈을 일으키기 전에 추석연휴와 개천절, 한글날 등 공휴일이 포함된 점도 영향을 미쳤다.

추석·공휴일에도 잔업, 법원 “휴일 부족”

A씨는 2021년 11월 법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소송이 길어지며 지난해 8월 끝내 숨을 거뒀다. 고인이 사용한 자택 PC 포렌식 결과 등의 사실조회 회신이 늦어졌던 영향이 컸다. 법원은 소송 제기 2년2개월 만에 A씨 손을 들어줬다. 허 판사는 “고인은 사업장에 있는 PC 로그 기록만으로 확인되지 않는 다수의 시간 동안 집에 있는 PC를 이용해 업무를 한 것으로 보인다”며 “고인의 업무시간은 사업장 PC 기록만을 토대로 인정한 업무시간 범위를 상당히 초과한다”고 판시했다.

실제 사실조회 결과, A씨는 한글날부터 주말까지 3일간 집에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특히 자택 PC 로그 기록에 따르면 토요일 오후 11시52분께까지 업무를 했다. 추석연휴 기간과 개천절에도 집에서 업무 관련 자료를 작성했다. 게다가 자정을 넘겨서 일하거나 출근시간 이전에도 업무한 기록이 집 PC에 남았다. 허 판사는 “이러한 사실은 재해조사서에는 반영돼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노동부 고시상 ‘정신적 긴장이 큰 업무’와 ‘휴일이 부족한 업무’에 복합적으로 노출됐다고 판단했다. 기존 업무 사례가 없어 A씨가 창의적인 사고력과 분석력이 필요한 문서를 작성해야 했던 점을 근거로 들었다. 법원 감정의(직업환경의학과)도 “재택근무가 업무시간에 포함돼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가 인정된다면 뇌내출혈 발생의 원인 중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고 소견을 냈다.

A씨를 대리한 김용준·김위정 변호사(법무법인 마중)는 “재택근무 시간도 과로 평가에 산입돼야 하고, 비일상적인 근무시간은 과로의 가능성을 높인다는 법원 입장을 확인했다”며 “특히 재택근무의 경우 근무한 시간을 특정하기 어려운데, 재해자가 업무에 사용한 집의 PC 하드디스크를 포렌식한 점이 유효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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