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혜경 노동법 박사 (laborkyung@hanmail.net)

1994년 서울지하철 파업

1994년 6월24일부터 30일까지 1주일 동안 지속된 서울지하철노조 파업은 11차례에 걸친 임금협상이 결렬된 데 따른 것이다. 노조는 총액기준 15.54%인상과 100억원의 사내복지기금 출연 등을 요구했으나 공사는 3%의 인상과 30억원의 복지기금 출연을 제의해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당시 파업은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가 8시간 노동제와 민주노조 결성 등을 요구하며 사무실에서 농성을 벌이다 공권력 투입으로 연행되면서 전국적인 철도파업으로 이어져 사상 유례없는 최악의 교통난을 유발했다.

서울지하철 노동조합은 1·2호선 군자차량기지에서 노조원들이 대거 결집한 가운데 사실상 준법운행을 선포하고 본격적인 파업과 농성에 돌입했다. 결국 우려대로 1~4호선 열차운행을 일부 단축운행하거나 중단됐다. 서울의 경우 1호선을 비롯해 2~4호선 지하철 운행이 대부분 30분 간격으로 늦춰지고 열차가 연착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정부는 파업 철회 요구에도 노조가 끝내 파업을 강행하자 공권력을 투입해 파업에 동참한 노조원들을 수색·체포했고, 경희대 등 노조원들이 은신하거나 파업 중인 곳에 전투경찰을 투입해 노조원과 연대한 대학생들을 체포하고 파업을 강제해산했다. 파업에 동참한 전기협 노조원들도 기독교회관에서 경찰에 체포돼 구속됐고 파업은 해산됐다.

공사는 파업 철회 이후 파업 적극 가담자 638명을 직위해제하고 파업주동자 185명을 사직당국에 고발해 노조원 9천여명 중 2천872명이 징계 조치하는 등 최대 규모의 처벌이 이뤄졌다.

1995년 한국통신 파업

1994년 5월부터 한국통신은 공기업 임금 가이드라인(기본급 3%+성과금 20%)의 철폐를 주장하며 기본급 8만원과 상여금 인상 등을 요구했다. 아울러 통신시장 개방 반대, 대기업 위주의 통신산업 민영화 중지 등을 내걸면서 노사 간 갈등은 노정대립으로 발전했다. 갈등이 깊어지자 이듬해 4월26일 사측은 유덕상 한국통신노조 위원장 등 간부 64명을 고소·고발하고 5월16일에 이들에 대한 중징계 방침을 결정했다. 노조는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상황실을 설치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조합원들은 준법투쟁에 돌입했다. 6월6일 정부는 조계사와 명동성당에 사전 통보도 없이 전격적으로 경찰병력을 투입해 간부들을 모두 연행·구속했다.

같은해 5월19일 김영삼 대통령은 IPI 한국위원회 위원장과 21명의 이사진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한국통신 사태와 관련해 “한국통신노조가 불법행위를 계속해 정보통신 업무를 방해하는 것은 국가전복의 저의가 있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한 “정부는 이번 사태를 단순한 노사분규 차원이 아니라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태로 보고 있다”면서 “나는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지키고 국민생활을 보호해야 하는 헌법상의 책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앞으로 어떤 경우든 법을 어기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한국통신노조가 임금이나 직급 문제만이 아니라 개별 사업장 차원에서 해결이 힘든 민영화 문제나 통신시장 개방 반대 등 경영사항이라 불리는 문제를 들고나온 것은, 경영사항이 의무적 교섭사항이 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의 태도에 따라 불법파업으로 규정됐다. 그러나 불법파업이라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상의 책임을 물으면 되는 것이지 이에 대해 ‘국가전복 기도’ 운운하는 것은 김영삼 정권의 노동정책이 과거 군부독재 시절의 권위주의적 노동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계도 이러한 김영삼 정권의 안보적 차원의 접근에 대해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명동성당 측은 “종교계가 중재 노력을 하는 가운데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해 매우 유감스럽다. 현 정부는 2천년간 지켜온 교회법을 침해했다”면서 “군사독재 시절에 지탄받던 비도덕적 권력의 남용은 현 정부의 모습 역시 다를 바 없다. 앞으로 일어날 사태에 대한 책임은 모두 정부측에 있다”고 강력히 항의했다.

노동법 개악을 반대한 총파업 투쟁

1996년 12월26일 새벽 신한국당이 단독으로 ‘노동법 개악안’을 기습 날치기 통과시키자 반민주적 폭거에 대항해 “신한국당의 노동법 개악안 기습 통과는 원인 무효다. 노동법 개악안 날치기 통과한 신한국당은 해체하고 김영삼 정권은 퇴진하라”라고 주장하며 민주노총은 이날 오전부터 전국 산하 모든 사업장에서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민주노총 자체 집계로 총 413개 노조와 37만여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했고, 한국노총의 경우는 1997년 1월15일 1천650개 노조, 40여만명의 조합원이 파업에 참여하는 등 최대규모 총파업이 전개됐다.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반대를 위한 총파업 투쟁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개별 자본가를 상대로 임금인상 등 경제적 이해와 요구를 걸고 투쟁한 것과 다르게, 국가권력을 상대로 해 노동관계법과 민주주의의 확장을 위해 노동악법 및 안기부법 철회를 요구조건으로 파업한 것으로써, 전국적으로 전 산업에서 전개된 최초의 정치적 총파업 투쟁이었다.

민주노총은 ‘노개투(노동법 개정 투쟁) 총파업 보고서’를 통해 1996~1997년 노개투에 대해 자체 평가를 진행했다. 민주노총 위원장은 머리말에서 “지난 1년은 모든 역량을 노동법 개정 투쟁에 바친 1년이었고 (중략) 1년 내내 계속된 노동법 개정 투쟁은 마침내 건국 후 최초의 전국 총파업 투쟁(중략)으로 세계 노동계를 뒤흔든 정치 총파업은 너무 장대하고 위대한 투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민주노총은 노개투 총파업 투쟁의 의의를 ①날치기 노동법 저지, 법 개정 등 정권의 후퇴를 이끌어 냄 ② 민주노총의 조직력을 확대·강화하고 산별노조 건설토대 구축 ③ 민주노총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 강화 ④ 조합원 정치의식 강화, 노동자를 민주주의 투사로 각인시켜 정치세력화 토대구축 ⑤ 노동자 총파업 투쟁이 범국민적 투쟁을 선도하고 투쟁의 확산을 가져 옴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 투쟁은 단지 노동법·안기부법의 날치기 통과를 저지한다는 점을 넘어서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공세적 대응으로 확장되지 못한 한계가 존재했다. 노개투 총파업 투쟁 1년 뒤인 1997년 12월 IMF 외환위기와 1998년 김대중 정권에 의한 시장자유주의적 노동체제(정리해고제의 요건 완화 및 근로자파견제 입법화 등)로 한국 노동시장이 ‘비정규직화’와 ‘맘대로 해고’가 너무도 당연시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지게 됐다.

노동법 박사 (laborkyung@hanmail.net)

*이번 회를 끝으로 유혜경의 한국노동역사 연재를 마칩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