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전경.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교섭대표노조의 ‘창립기념일’만 유급휴일로 지정한 단체협약은 합리적 이유가 없는 차별로서 공정대표의무 위반에 해당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다만 교섭 과정에서 소수노조의 의견을 수렴하는 등 ‘절차적 의무’는 위반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소수노조의 기본권 자체가 침해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정대표의무’는 사용자와 교섭대표노조가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에 참여한 노조나 조합원 간에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위자료 5천만원 배상 요구 “절차·내용 모두 차별”

6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금속노조가 광주시 광산구 소재 자동차부품 제조업체인 기광산업의 회사노조와 위원장 A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상고심에서 지난달 29일 원심 판결 중 원고 패소 부분을 깨고 사건을 광주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사건의 발단은 2018년 기광산업에 복수노조가 설립되면서 비롯됐다. 금속노조 광주전남지부 기광산업지회가 그해 6월 설립된 지 한 달 만에 회사노조가 만들어졌다. 당시 회사노조 조합원 수는 35명으로, 지회 조합원(14명)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회사노조는 교섭대표노조로 선정돼 회사와 2018~2020년 단체협약 또는 임금협정을 체결했다.

그런데 2018·2020년 단체협약에서 회사노조의 창립기념일만을 유급휴일로 정하고, 노사 협약체결 과정에서 지회 의견이 배제되면서 갈등이 불거졌다. 지회는 회사노조를 상대로 정신적 손해에 대한 위자료 5천만원을 배상하라며 2021년 2월 소송을 냈다. 지회는 회사노조가 △교섭요구안·교섭진행 과정·잠정합의안 등에 대한 정보제공 및 의견수렴 의무 △교섭 종료 후 협약 송부 의무를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단체교섭 과정에서 ‘절차적’ 차별이 있었다는 것이다.

1·2심 ‘잠정합의안·교섭요구안’ 미제공만 법 위반

1심은 회사노조의 손해배상책임 일부만을 인정했다. ‘잠정합의안’에 대한 정보제공과 의견수렴 의무 위반 부분만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인정 손해액은 청구금액(5천만원) 중 300만원만 인정됐다. 재판부는 “피고들은 2020년 단체협약 및 2021년 임금협정 체결을 제외한 나머지 협약체결 당시 지회에 잠정합의안 마련 사실을 알리거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전혀 거치지 않았다”며 “교섭대표노조가 가지는 재량권의 범위를 일탈해 지회를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함으로써 절차적 공정대표의무를 위반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기존 판례 태도를 따랐다. 대법원은 2020년 10월 “단체교섭의 전 과정을 전체적·종합적으로 살필 때 소수노조에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항에 대한 정보제공 및 의견수렴 절차를 충분히 거치지 않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절차적 공정대표의무를 위반했다”고 판단한 바 있다. 그러나 나머지 절차적 공정대표의무 위반 주장에 관해선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다. 회사노조의 창립기념일을 유급휴일로 지정한 부분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유급휴일) 지정 과정에서 지회에 대한 설명이나 의견수렴 절차 등 참여가 배제됐다는 점에 대한 주장·입증이 없다”며 공정대표의무 위반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2심에서는 인정 손해액이 400만원으로 소폭 늘었다. 1심이 인정한 ‘잠정합의안 정보제공 의무’에 더해 ‘교섭요구안 정보 미제공’까지 인정한 데 따른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들은 지회의 수차례 요청에도 최종적으로 마련한 단체교섭요구안을 설명하거나 알려주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다만 나머지 공정대표의무 위반 행위는 1심과 마찬가지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 “회사노조 입증 책임 있어” 파기환송

그러나 대법원은 원심을 뒤집고 ‘회사노조의 창립기념일을 유급휴일로 지정한 행위’는 공정대표의무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회사노조나 사용자가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에 참여한 다른 노조 또는 조합원을 차별한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 차별에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는 점은 회사노조나 사용자에게 주장·증명책임이 있다”며 “그런데도 원심은 원고가 제출한 증거가 피고들이 고의 또는 과실로 원고를 차별했음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는 이유로 원고 주장을 배척했다”고 지적했다. 다만 절차적 의무 위반에 관해선 원심 판단을 유지했다.

법조계는 교섭 과정에서 정보를 미제공한 점이 공정대표의무 위반으로 인정되지 않은 점은 기존 대법원 입장과 배치된다고 지적했다. 윤수빈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 호남사무소)는 “소수노조(지회)가 교섭 시작이 언제 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 사실상 교섭대표노조(회사노조)가 지회를 교섭과 협약체결의 전 과정에서 배제한 것과 마찬가지였다”며 “그럼에도 공정대표의무 위반을 인정하지 않은 대법원 판단은 ‘공정대표의무는 단체교섭 전 과정에 걸쳐 지켜야 한다’는 기존 대법원 판결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소수노조의 교섭권 침해를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회사노조의 창립기념일을 유급휴일로 지정한 행위’ 판단에 대해선 “취업규칙에는 원래 회사의 창립기념일을 유급휴일로 정했는데, 회사노조와 합의로 회사노조 창립기념일로 전환됐다”며 “기존의 유급휴일을 삭제하는 불이익을 가한 것으로, 별도로 제기한 통상임금 소송에서도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이 인정됐다”고 설명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