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자국 반도체산업 육성을 위해 시행하고 있는 반도체법이 금융자본주의에 따른 축적체제를 부정하고 국가 주도의 산업정책 추진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진단이 나왔다. 시장에 경제를 맡겨왔던 기존의 미국식 자본주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가 전면에 나서고 있다는 의미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윤석열 정부와는 다른 흐름이다.

5일 금융경제연구소(소장 조혜경)의 ‘미국 반도체법의 산업정책적 함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 2022년 8월부터 반도체법을 시행하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법 제정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 부문에서는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지만 제조 능력은 사실상 없다. 코로나19로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이 흔들리자 미국 내에서는 반도체 해외 의존에 대한 우려가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이는 금융산업을 중심으로 단기수익에 치중하는 미국 경제 시장을 개편해 제조업 기반을 확보하고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반도체법은 반도체 생산을 지원하는 기금을 조성하고, 미국 내 생산기지를 구축하고 반도체 인력을 육성하는 민간기업에 다양한 재정 지원을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반도체법 지원 우대 요건에는 초과수익 공유, 자사주 매입과 배당 금지, 재투자 의무, 사회·환경 의무 준수이 담겨 있다. 단기 수익과 주주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금융자본주의 원리와 배치된다.

조혜경 소장은 보고서에서 “반도체법은 납세자 투자의 직접적인 결과로 발생한 이익을 기업의 주주가 전유해서는 안 되며 납세자 전체, 미국 사회 전체가 공유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며 “이런 정책적 태도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접근이라는 점에서 (미국) 경제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정부 주도의 산업정책을 지양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긴 뒤 보완 기구로서 역할을 낮춰 잡았던 미국식 자본주의를 수정했다는 얘기다.

기업의 사회·환경 의무 준수를 유도하는 내용이 담긴 것도 반도체법의 특징이다. 산업정책이 기업에 사회·환경 의무를 부여하고, 공적인 의무를 수행하도록 강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조 소장은 “미국 반도체법은 사회적으로 공정하고 이익의 민주적 배분을 지향하는 산업정책의 출현을 의미하고, 이는 주류 경제학의 두 가지 흐름인 케인즈주의적 국가 개입이나 신자유주의적 국가 개입과 전혀 다르다”며 “성공 여부는 아직 미지수지만 자유시장과 작은정부론의 폐기와 경제안보 우선의 국가 주도 자원 배분을 특징으로 하는 ‘큰정부’의 전면적 부상을 예고하는 모습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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