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해도 돼요?”

회사 건물 한쪽에서 조용히 만난 이 사내들은 이렇게 물었다. 조합원 간담회를 하려고 해도 몇 명 모이지 않는다고 하길래 “노조란 곁입니다” 노동하는 현장의 바로 곁에서 노조를 느껴야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사용자의 압력을 이겨낸다고 말했다. 간담회를 온라인에 공지하고 말면 오프라인 접촉에 익숙하지 않은 조합원은 모일 가능성이 낮다. 간부들이 조합원이 일하는 현장을 순회하며 알리는 것도 방법이다. 그런데 그렇게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며 해도 되냐고 묻는다.

“일하고 있을 때 현장 사무실을 돌아다녀도 되나요”. 이들은 그렇게 할 경우 일에 방해가 돼 생산성이 낮아질 것을 걱정했다. 제조업 생산라인에서 바쁘게 일하는 경우에도 현장 순회를 하며 조합원과 악수까지 한다. 그런데 사무실 잠깐 들러서 “간담회 오세요” 한 마디하고 지나가는 것이 뭔 생산성에 영향을 미칠까. “법적으로 괜찮은 건가요” 이런 질문이 이어진다. 제대로 된 노조라면 현장 순회는 일상이다.

“규정이나 단체협약에 홍보물은 회사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어요”. 기성노조가 있는 이곳의 단체협약에 그런 것이 있는 이유는 그 노조가 사용자의 주도권 아래에 있는 어용이기에 어떤 이견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것이 틀림없다. 이곳엔 언론, 출판의 자유가 없다. 이렇게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 멈춰 선다. 이런 곳은 통계상 노조가 조직된 것처럼 잡히겠지만 사실은 기업독재의 영토일 뿐이다.

목구멍 독재

“너무 바빠서 모일 수가 없어요”. 도심의 카페에서 만난 방송계 프리랜서의 동료들도 이렇게 말했었다. 그런데 이분도 자신이 얼마나 바쁜가를 얘기했다. 새벽 1시에 회의가 갑자기 잡히기도 한다. 언제 호출받아 일을 처리할지 모른다. 그래서 노조 회의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다들 그래서 노조는 생각할 틈도 없어요”. 들을수록 너무너무 바빠서 자신의 권리를 챙길 시간이 1도 없다는 것이다. 늘 고용이 불안해 몇 개월이나 일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럼 이때는 어떨까. 그런 기간은 여유도 휴식도 아닌 일을 구하려 발버둥 치거나 불안정한 상태를 더 깊이 느끼는 ‘불안의 시간’이다.

이분이나 이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만 들은 얘기가 아니다. 디지털 콘텐츠를 만드는 분들도 이런 얘기를 했었다. 고용 없는 이들은 간헐적 계약을 통해 불안정하게 노동한다. 루틴이 있다고도 하기 어려운 상태로 바쁘게 살다 보니 동료들을 만날 수 없다. 저 너머 어딘가에, 혹은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익명의 문자로 만나는 동료들은 오프라인에서 일을 서로 따내려는 경쟁자로 남아 있다.

그러나 만나면 안다. 자신들의 처지가 얼마나 같으며 얼마나 많은 공감할 얘기들이 많은지 오감을 넘어 육감까지 동원해 느끼고 확인한다. 그런데 바빠서 만나지 못한다. 먹고 사느라 바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했던 조상들과 다를 바 없다. 이들은 먹고 살아야 하는 목구멍 독재에 이끌려 동료를 만나 자주적 결사를 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평생 허덕일 거예요

“그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경험이 없어요” 현장 순회를 한 번도 안 해 본 사내들은 정말 일만 하면서 살아온 범생 느낌을 준다. 이들은 지방만이 아니라 국경 넘어 출장도 꽤 다닌다. 그러다가 오늘처럼 이렇게 만나 겨우 이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약속을 잡는데도 몇 차례나 미뤄진 끝에 잡혔다. 이들은 노조에 대해 간헐적으로만 접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떤 만남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따라서 다르지 않을까요”. 동료들과 만남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묻자 그분이 답했다. 도저히 바빠서 노조 따위는 생각할 시간도 없다지만, 의미가 충분히 부여된다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의미를 누가 찾아서 부여할까. 바쁜 이분들은 그런 의미를 스스로 찾아 모일 가능성이 있을까.

‘먹고사니즘의 덫’을 떠올렸다. 먹고사니즘에 바쁜 이들은 자본주의에 충실히 적응해 생존에 필요한 이익을 찾아 조금이라도 더 실리를 얻으려 발버둥 친다. 이분은 노조에 가입했지만 소수노조다. 이런 상태에서 조합원이 늘어날 가능성은 낮다. 혹자는 투쟁만이 해방에 이르게 한다지만, 교섭이든 투쟁이든 노동 3권의 첫째인 자주적 단결이 없으면 그림의 떡이다. 정반대로 노조를 만든 지 불과 5년 만에 연봉이 두 배 오른 사례도 있다. 압도적 다수를 조직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이것이 노사 간 기울어진 역학을 바꿔 굳이 으르렁거리며 전투성을 드러내지 않아도 변화를 만든다.​

‘생계에 허덕이는 자 평생 허덕이리라’. 이분들을 만나며 더욱 선명해지는 생각이었다. 40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때로는 경험하고 때로는 관찰한 결과 얻은 하나의 결론이 이것이다. 이익이라는 에너지가 작동하는 경제적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권리라는 에너지가 작동하는 새로운 차원에 도달하지 못한다. 권리의 세계에 이르지 못하면 평생을 열심히 일해도 생존에 허덕이다 생을 마감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금까지 불안했고 이대로 불안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해요”. 그분은 이 얘기를 하다가 끝내 눈시울을 붉히며 얼굴을 적셨다. 그래서 대놓고 그렇게 살다가는 평생 생존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지 못했다.

간헐적 시민들

시민의 엑기스는 무엇인가. 시민을 시민답게 만드는 것 말이다. 그것은 권리다. 가장 낮은 생존권에 허덕일 뿐, 직장에서 발언할 권리, 사용자와 교섭을 통해 임금과 노동조건 결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냐는 것이다. 헌법은 국민을 주권자라고 명확히 말한다. 비록 걸리적거리는 제한 조항이 있지만, 법률은 시민들에게 다양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처럼 쓰여 있다. 그러나 내가 만난 일하는 시민들은 기업이라는 독재의 영토, 목구멍 독재에 시달리며 산다.

국민이 주권자라는 헌법 제1조를 외치며 광장에 설 때,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누리는 시민이 된다. 그러나 광장에 나가 데모하는 시민이 얼마나 될까. 결코 절대다수라고 할 수 없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익명으로 무슨 얘기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용자 앞에서, 클라이언트 앞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민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다가 선거가 다가오면 주권자라며 투표한다. 간헐적으로만 주권을 발휘할 뿐이다.

정치의 계절이라는 선거가 다가오자, 한 정치인은 “동료시민”이라는 단어를 꺼내 들었다. 비판도 있고 약점도 보여서 그런지 언론을 통해서 보면 기대한 만큼 이 단어를 자주 쓰지는 않는 것 같다. 이번에 만난 이들은 가끔 여유를 얻거나, 가끔은 행복할 권리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삶의 대부분을 투자하는 노동시간에는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도 비참한 존재로 여기지 말고 가능성을 발견하자고 늘 다짐하지만, “얼어 죽을 동료시민이란 말인가”하는 마음이 가득 찼다. 우리 곁의 많은 사람들은 ‘동료시민’이 아니라 ‘가끔시민’이다.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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