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울 공인노무사(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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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법적으로 판단을 받는다는 것은 진짜 사실이 무엇인지가 아니예요. 나의 주장을 어느 정도 증명하느냐의 문제인 거죠. 그러니 너무 개의치 마세요.”

2024년 1월23일 오후 2시쯤 걸려 온 전화상담에서 한 이야기이다. 증거 수집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법적인 판단이 잘못됐어도 그 일이, 그 부당함이 거짓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의 말에 귀기울이고, 부당함에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무언가를 증명한다는 건 자신의 기억과 감정에 의심을 품고 하나하나 증거를 찾아내 설명해 내는 일이다. 이 과정은 고되고 막막하며, 때때로 고통스럽다. 타인의 경험을 증명해 내는 일이 익숙한 나에게도 내 기억과 경험을 증명하는 건 고되고 막막하며, 종종 쪼그라든다. ‘증명’을 매일, 어디에서든 요구받는다면 어떨까.

“트랜스이자 공개적으로 그 사실을 밝힌 사람으로서 나는 늘 사람들에게 나를 믿어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아마 대부분의 트랜스라면 공감할 것 같다. 눈을 찡긋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람들의 반응에 지쳐버렸다. … 나는 내 몸에 쏟아지는 징그러운 관심,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고자 하는 충동에 진력이 난다.” (<페이지보이> 엘리엇 페이지 지음, 밤비 펴냄)

엘리엇 페이지는 <페이지보이>라는 책을 통해 할리우드에서 ‘여배우’로서 겪어야 했던 일들, 2번의 커밍아웃의 경험, 그리고 진화하고 변화하는 현재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일터에서 경험한 젠더 디스포리아와 다른 사람의 삶을 연기하는 ‘배우’라는 직업 사이에서 겪는 혼란스러움과 편안함 등 꼬이고 뒤틀린 감각들에 대해서도 써내려 간다. 이 책은 분명 엘리엇의 고유한 경험이지만, 한국에 사는 트랜스젠더와도 통하는 보편성도 있다. 앨리엇에게도 그랬듯, 많은 트랜스젠더는 그냥 존재하기 위해 증명을 요구받는다.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배우가 아니더라도, 많은 트랜스젠더 노동자는 일터에서 특별한 설명을 요구받고 그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요구받는다.

“면접관이 혼자 보는 게 아니거든요. 일 대 다수를 보든지, 다수 대 다수를 보던지. 차라리 일 대 일이면 상관이 없는데, 다수 대 다수에서 아웃팅을 당하면 완전 정말 화가 나요. 면접관이 서류 보더니 막 인상이 찌푸려져요. “저기 ○○○씨, 남자세요?” 사람들이 다 나를 봐요. 놀라움과 좀 그런 시선 있잖아요. 그런 표정으로 저를 보면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건가?’ 왠지 모르게 창피하고, 뛰쳐나가고 싶고. 그럼 어쩔 수 없이 나지막하게, “네”라고. 그럼 이제 거기서 또 호구조사 당하는 거예요. “뭐 어쩌다가 성전환하시게 된 거예요? 여자로 지내는 게 편하세요? 남성으로 지내는데 어쩌고저쩌고….”

“사람들이 저 보면 쟤는 남자야 여자야 물어보는 상황이어서 계속 설명해야 하는 것도 힘들었고요. 그리고 당시에 기숙사 생활했었거든요, 기숙사랑 화장실에서 쫓겨난 경험이 많아요. (중략) 그런 환경에서 지내는 게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나, 성소수자 노동자” 두 번째 이야기-둘로 나뉜 세상에서 살아남기>)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성별 이분법에 의해 여성과 남성 둘 중 하나로 분류된다. 성별은 삶 전반에 걸쳐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으로 끊임없이 재생산해 그의 몸과 정신에 깃든다. 그렇게 대부분은 자신의 성별에 의문을 갖거나 고민하지 못하고, 스스로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두 가지 성별 사이를 떠다니고, 탐구하고, 변화하는 존재를 부정한다. 일터도 마찬가지이다. 화장실, 탈의실, 기숙사, 옷차림 나아가 특정 제스처, 역할 등등 거의 모든 것이 두 가지 성별로 나뉘어 있다. 두 가지 성별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애초에 일터에 진입할 수 없고, 진입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숨겨야 하며, 드러낸다면 언제든지 쫓겨날 각오를 해야 한다. 분명 일터 내에서 발생하는 폭력이자 차별이다.

지금 이 순간도 일터에서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많은 이들을 안다.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들려오기를 기다린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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