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미경 전태일재단 기획실장

끝까지 엉뚱했고 몹쓸 아이디어를 냈다. 봉제인 백남정 본인도 주변도 죽음을 준비하던 때, 마지막 인사차 만났던 친구이자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 간부들에게 “하늘나라 가서 로또 번호 보면 가르쳐 주겠다” 하고는, 일주일 뒤 세상을 떠났다. 쉰넷이었다.

어느 봉제인의 삶과 죽음, 그리고 연대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모임이 많았다’고 기억한다. 바느질이 꼼꼼했던 재봉사였으므로 재봉사 모임은 기본이고 띠동갑 모임에 백두대간 종주하느라 다닌 산악회까지. 서울봉제인지회도 가두선전전을 보고는 스스로 찾아왔다. 모임에 들면 혼자만 다니지 않았다. 같은 작업장에서 일하는 아내에게, 또 재봉사들에게 지회 가입을 권했다. “봉제인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는 단체가 필요하다”는 단순명쾌한 이유를 댔다.

지회에서는 봉봉산우회 총무를 맡았다. 봉제인의 봉, 봉우리의 봉이다. 건강이 괜찮았던 재작년 봉제인의 날에는 문무를 발휘했다. 조합원들과 댄스팀을 이뤄 디스코를 췄으며 봉제인 수기집에 ‘차박’ 기행문도 썼다. 지회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병세가 깊어졌음에도 부지회장을 맡아 생의 의지를 다지려 했다.

아픔과 상처를 잘 다독이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가 그랬던 거 같다. 한 인간의 깊은 우물을 다 볼 수는 없으니 ‘같다’고 하겠다. 열여섯에 ‘시다’로 시작해 38년을 ‘미싱’을 밟았어도 집 한 칸 남기지 못했다. 군 복무 중이던 아들을 먼저 보내고 가슴에 묻었다. 군대 내 가혹행위를 밝히려 했으나 의문만 더 쌓이고 말았다. 사무치게 그리운 아들 곁으로 돌아간 그에게 남은 가족은 부인과 강아지 두 마리가 전부였다.

마지막 가는 길의 동반자로 지회가 나섰다. 지회장이 호상을 맡았다. 간부와 조합원들이 장례 전반의 진행을 챙겼다. 지인들이 일거리가 없다면 일을 구해 주려고 애를 썼던 그였기에 조합원이 아닌 봉제인들 또한 속속 달려왔다. 지회와 절친한 제화·주얼리·인쇄 같은 도심제조 노동조합도 조화와 문상으로 위로했다.

모범조직상을 받는 전태일의 후배들

한 세대 전이라면 소외된 민중, 억압받던 노동자로 그를 추모했겠다. 하지만 오늘의 서울봉제인지회는 봉제인의 좋은 삶과 좋은 노동을 같이 일구자던 좋은 조합원으로 기억한다. 봉제인 백남정은 “서울봉제인지회는 신세계다”고 말했다. 네팔 어린이들에게 교복과 체육복을 직접 제작해 기부하고, 아기 턱받이를 만들어 싱글맘들에게 선물하고, 조합원이라면 가입하는 공제회의 기금으로 건강검진비를 지원하고 급히 돈이 필요한 조합원에게 저리로 대출하는 노동조합에 그는 환호하며 함께했다.

글로벌경제에 포박된 한국의 봉제산업 구조에서 사측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옷이 날개인지 자본이 날개인지, 공임이 싼 곳을 찾아 국경을 넘나든다. 사측과 교섭할 수 없는 노동조합은 조합원에게 경제적 이익을 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스로, 또 서로 돕는 공제회로 이 시공간의 이동에 맞서고 있다.

모든 관계에는 책임이 따른다. 한 조합원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 또한 쉽지 않은 결단이자 실천이다. 일상을 조직하는 것은 일상을 반납한 간부와 대의원들의 솔선수범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한편 헌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게 있다. 서울봉제인지회는 공정임금·공정단가 실태조사, 노동이력증빙제도, 4대 보험 일부 지원제도, 비수기 실업수당 지급 실시를 위한 사회적 교섭을 준비 중이다. 촘촘한 관계망으로 연결된 389명의 백남정들이 최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배우고 있다.

불과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은 칠이 벗겨진 벽화로 남았으나, 오늘의 전태일들은 그 차디찬 벽에 새 물감을 칠하고 있다. 오는 2월5일 2024 민주노총 정기대의원대회에서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가 모범조직상을 받는다. 일정이 아닌 일상으로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는 후배들이다.

전태일재단 기획실장 (mgpark20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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