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민석 자유기고가

1919년 막스 베버는 독일의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과 민주주의에 관해 대화를 나눈다. 베버가 “인민은 그들이 신뢰하는 한 사람의 지도자를 선출한다. 이어서 대표로 선출된 사람이 말한다. ‘지금 당신들은 아무 소리 말고 복종하라. 인민과 정당들이 지도자와 상충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고 말하자 루덴도르프는 “그런 민주주의는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베버는 “그런 다음에 인민은 심판할 수 있다. 만약 지도자가 잘못한다면, 그를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했다.(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박상훈 역, 폴리테이아, 2011, pp. 73-74.)

퇴임한 전직 대통령들을 사법처리하는 ‘전통’(?)을 지닌 한국 민주주의가 연상되는 일화이지만, 마르크스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주목하게 되는 지점은 ‘책임’보다도 인민과 정당들의 지도자에 대한 “복종”을 강조한 베버의 말이다. <경제와 사회>에서 베버는 지배를 “자신의 의지로 타인의 행동을 강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 규정한다.(막스 베버, <지배의 사회학>, 금종우 외 역, 한길사, 1981, p. 10.) 그에 따르면 지배 자체는 다양한 차원에서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로는 전통, 카리스마, 그리고 합리적 절차에 따른 합법성만이 있다.

베버는 특히 ‘카리스마적 지배’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것이 정치가의 ‘본래적’인 의미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무릇 정치인이란 특정한 소명을 실현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며 사람들은 그가 그런 사람이기에 믿고 그의 지배를 받아들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믿음’을 매개로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어떤 ‘비약’이 발생한다. 개인이 자신의 ‘개별성’을 부정하고 지도자와 스스로를 일치시키는 비약을 전제로 ‘지배’에 대한 ‘복종’이 나타나는 것이다.

자신의 개별성을 넘어선 비약에 가까운 동일화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달리 표현하자면 그 ‘믿음’은 어떻게 성립할까? 이는 어쩌면 우문(愚問)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 노력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노조와 정당 등 가입과 탈퇴가 가능한 ‘중간적 단체’로서 공동체의 자립 여부가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중간적 단체들이 개인에게 ‘복종’을 요구하기에는 전통성과 합법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느 지점에서 단체의 정체성과 그 소속 구성원으로서 개인의 정체성 간 ‘일치’가 이뤄져야 한다. ‘카리스마적 지배’에 대한 베버의 설명에서는 이러한 집단에 의한 ‘비약’이 빠져 있다.

과도한 일반화일지 모르겠지만 이런저런 단체 활동을 경험하고 나서 깨달은 바는 한국인들은 조직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당이 됐든 시민단체가 됐든 뭐가 됐든 간에 조직 자체에 충성하려는 이들이 많지 않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면 나 스스로부터가 조직에 헌신하다가 조직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이들에게 착취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걱정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조직과 개인이 제대로 분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을 뒷받쳐주는 용도로 조직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착취당할지도 모른다 우려했던 것이다. 먼저 개인과 조직이 제대로 분리돼 조직의 정체성이 확립돼야지만 그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요구할 수 있다.

제3지대 운동에 참여하겠다는 류호정 의원이 탈당 기자회견에서 정의당에 “민주당 2중대”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류호정의 비난이 못내 더 아픈 이유는 정의당이 스스로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의당은 어떤 정당인가? 김준우 비대위원장은 생태·평등·돌봄 사회국가를 추구하는 정당이라 말하지만 이러한 표현들이 개인에게 ‘희생’과 ‘헌신’, 그리고 무제한적인 ‘믿음’을 요구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누구를 위한 생태이며, 누구를 위한 평등이고, 누구를 위한 돌봄인가? 정의당이 누구를 대표하며, 그들이 누구인지, 왜 그들을 대표해야 하는지 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게 우선 아닐까? 그때 비로소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 정치”로 “사람에 충성하는 정치”의 시대를 넘어설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유기고가 (fpdlakst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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