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석 소설가·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이현석 소설가·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몇 달 전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 참여했을 때 일이다. 당시 회의는 정신질환이 대상이었는데, 한 자살 사건에 눈이 갔다. 해당 사건의 피재자는 공공기관에 소속된 여성 예술가로, 연습 중 부상을 당해 휴직했다가 뒤처지는 느낌에 압박을 받다 사망했다.

이 자료에 눈이 머문 까닭은 그날이 내가 인지행동치료를 종료한 지 보름이 흐른 시점이라서였다. 그러니까 나는 해당 사건의 산재여부를 판단할 의사이기 전에, 예술적 열망이 스스로를 어떤 식으로 해하는지 생생히 겪은 한 소설가였다. 주어진 정답 없이 결과를 창조해야 하는 작업은 무한한 선택지 사이에서 길을 잃고, 뭐가 더 나은 선택인지 모른 채 마무리한 작품을 발표하고 나면 직면할 수밖에 없는 평가 탓에 예민해진 영혼은 더 취약해진다.

우울과의 늪에서 갓 빠져나온 상태였기에 나는 자료에 쓰인 모르는 사람의 기록이 잘 아는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자료를 읽어야 하는 사람은 소설가가 아니라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여야 했다. 객관성이란 안경으로 고쳐 쓴 나는 동질감을 지운 자리에 물음표 계속 붙였다.

이 사건에서 직장내 괴롭힘이 있나? 없다. 직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을 만한 요인을 사측에서 제공했나? 아니다. 예술적 성취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긴 정신적 고갈의 책임을 사측에게 물을 수 있나? 모르겠다. 물음표를 보탤수록 산재로 보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불승인’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일주일 뒤 판정위원회가 열렸다. 결과는 승인이었다. 단초는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휴직 사유가 연습 중 발생한 부상이었는데, 사측이 부상 치료를 적극 지원하지 않은 점이 확인됐다. ‘상해’라는 물리적 요인과 ‘적절치 못한 지원’이라는 행정적 요인이 명확해지자 다수 의견이 승인으로 선회했다. 나도 그랬다. 다행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하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동질감’이란 안경을 벗고 ‘객관성’이라는 안경으로 썼다고 최면을 걸었지만, 동질감은 결국 ‘나’를 사특히 확장한 것뿐이고, 객관성은 그 사특함에 대한 알리바이가 아니었는지. 내가 겪은 고통은 누구도 책임져주지 못할 텐데, 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지 않았는지. ‘누가 칼 들고 협박함?’이라는 시대정신을 수긍한 채 불행경쟁을 자처한 게 아닌지.

최근에 읽은 <일하다 아픈 여자들>(이나래·조건희·류한소·송윤정·이영희·정지윤 지음, 빨간소금 펴냄)은 그래서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았다. 내가 너보다 훨씬 힘들다고 서로를 깎아내리는 것이 기본값이 되어버린 세태를 떠올리면, 이 책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몸들은 ‘내가 너보다’라고 목청 높이기보다, ‘여기 이런 사람이 있다’고 담백하게 말했다. 그 담백한 목소리는 여성의, 장애인의, 빈곤노인의, 성소수자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의 목소리였고, 무엇보다 다양한 노동의 목소리였다.

각기 다른 몸에 깃든 각기 다른 정체성이 서로 다른 종류의 아픔을 이야기했다. 이를테면 배달 라이더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은 언어폭행이라든가, 교정교열자로 일하는 뇌병변 장애여성이 겪는 일터에서의 소외라든가, 노년의 지하철 청소원이 겪는 성추행 같은 것들.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들리지 않을 목소리가 있었고, 듣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되는 말들, 말하자면 정규직 방송국 직원이 계약직 방송작가의 면전에다 정규직화를 반대하면서 내뱉은 말 같지도 않은 말이라든지, 중대재해는 남성이 더 많으므로 남성에 비해 여성은 더 안전하게 일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그리하여 더 큰 목소리를 가져왔던 말에 단호히 대항할 수 있는 목소리도 담겨있다.

근대 노동자의 표준적인 육체는 건장한 비장애 이성애자 남성의 몸이다. 그런 몸이 아닌 다른 모든 몸이 내는 목소리를 듣고 퍼트리는 일은 서로 다른 모든 몸들뿐만 아니라 건장한 비장애 이성애자 남성의 몸에도 온기를 드리운다. 비장애인이 일상에서 누리는 편리의 상당 부분이 장애인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역사에 빚지고 있는 것처럼. <일하다 아픈 여자들>이 옮기는 목소리가 지금 이곳에 필요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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