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혜경 노동법 박사

신군부 정권의 성격

신군부 정권은 정권찬탈을 목적으로 공수부대를 국가폭력으로 동원, 광주시민을 희생양으로 삼아 5·18 살인극을 벌였다. 5·18 광주항쟁은 시위진압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한 과잉진압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신군부가 특정한 정치적 목적(정권찬탈)을 달성하기 위해 광주시민을 희생시킨 계획적인 살인극이었다.

‘사람사냥’을 한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이 광주시민들을 분노로 들끓게 했다.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에 애국가가 울려 퍼진 뒤 비무장 광주시민에게 헬기 기총사격을 가한 것은 무장시위대에 대한 자위권 차원의 발포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계획적인 살상행위였다.

신군부는 5·18이 ‘김대중의 배후조종에 의한 폭동’ 내지는 ‘북괴의 사주에 의한 폭동’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5·18은 배후조직도 지도자도 없이 전개된 순수한 항쟁으로서 무조직·무지도자 항쟁이었다는 점, 5월21일 도청 앞에서 발포명령이 떨어지면서 시위대뿐만 아니라 행인들에게까지 무차별 발포를 하게 되자 비로소 광주민중들이 광주교외로 나아가 카빈과 M1소총으로 무장하기 시작하면서 무장대응이 이루어졌다는 점, 끝내 다이너마이트나 TNT를 폭파하지 않고 고스란히 보관했으며 스스로 2천500여정의 무기를 회수해 계엄당국과 평화적 타협을 모색한 점 등을 통해 볼 때 무장투쟁이라기보다는 평화적 항쟁이었다.

그리고 신군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북괴의 사주에 의한 폭동이 아니었다는 점은 5월21일 계엄사령부가 광주 시내에서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고 27일 재진압 작전에 들어간 데에서 드러난다. 신군부가 일시 철수한 것은 광주가 절대로 북괴의 해방구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획적인 살육진압극을 위한 전술이었을 뿐이다. 광주시민들의 항쟁은 북괴의 사주에 의한 폭동이라는 신군부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신군부 정권은 삼청교육대에 범죄의 증거가 없는 사람들을 끌고 가 재판도 없이 무제한 구금, 폭행을 가함으로써 계엄법이 정하는 한계를 벗어난 위법을 자행했다. 또 언론통폐합을 자행함으로써 언론의 자유와 경쟁을 제한했다.

단결자치의 원칙 부정한 노동정책

신군부의 이러한 정치적 억압과 통제는 노동의 영역에서도 이뤄졌다.

첫째, 노조 정화조치를 통해 노조의 주요 간부를 정화대상자로 선정하고 노조활동에서 제외시키거나 사업장에서 해고시킴으로써 노조 활동을 탄압하거나 조합원수를 급격히 하락하게 만들었다.

둘째, 노동법을 개악해 제3자 개입금지, 기업별 노조 강제, 단체행동권 제한 등을 시행함으로써 권위주의적 통제를 가했다. 제3자 개입금지는 단결자치의 원칙에 위배되고 평등의 원칙에 반하며 제3자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적 조항이다. 기업별 노조 강제 역시 단결자치에 위배되고 노조설립에 국가가 간섭·강요하는 것으로써 노조자유설립주의에 위반한다. 그 외 노동쟁의에 대한 행정관청의 요구나 노동위원회에 의한 직권중재결정은 사전적인 노동쟁의의 제한으로서 헌법상의 단체행동권을 제한한다.

셋째, 신군부 정권은 노조의 주요 활동가를 정화대상자로 선정하고 이들을 노조활동이나 사업장에서 배제시키는 방법을 통해 민주노조를 적극적으로 파괴했다. 그리고 계엄사령부, 경찰, 사용자라는 3자의 연합된 물리력으로 폭력적으로 통제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대공업중심의 남성노동자들이 투쟁의 중심이 돼 광범위한 연대투쟁이나 정치투쟁을 해 국가에 대한 전면공격에 나서는 등 계급정체성을 강화시켰다.

그런데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억압과 통제와 1980년대 신군부 정권의 억압과 통제가 어떤 점에서 차별화되는가가 문제된다.

첫째,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노동정책이 폭력과 억압의 본질을 띠었지만 합법성의 외피를 두르려고 가장했다. 그러나 1980년대 신군부 정권에 의한 억압과 통제는 광주민중을 계획적으로 살인한 것처럼 모든 합법성의 외피조차 벗어버리고 살인적 폭력적 통제를 가했다.

둘째, 박정희 정권은 산업별 노조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기업별 노조를 통제하려는 외관을 형식적으로 유지했다. 즉, 박정희 정치권력은 노조의 상층부를 자신의 권력으로 포섭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없었다. 초기의 산업별 노조 체제도 순전히 예방적 차원에서 통제하려고 하는 시도에서 나타났을 뿐 이후 1960년대 내내 그들을 권력체제 내로 수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노동정책이 조합주의적 통제를 하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1970년대와 비교해 중립적이거나 포섭적 단계로 볼 수 없다. 억압적 통제가 본질이었고, 외피만 조합주의적 통제였다.

그러나 1980년대 신군부 정권하의 노동정책은 철저하게 산업별 노조나 지역적 노조를 해체시키고 국가가 강요해 기업별 노조를 유시시켰다. 외형상 모든 단결자치도 부정하는 철저한 살인적·폭력적 노동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노조의 대규모 전면공격

셋째, 살인적·폭력적 통제로 인해 민중운동이 고양되고 지식인·노동자나 학생운동 등의 현장참여로 지역연대투쟁,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간의 연대투쟁이 강화됐다. 노동운동의 성격이 사용자에 대한 저항에 기초한 경제투쟁에서 사용자 이외의 다른 사용자나 국가에 대항한 투쟁이라는 정치투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구로연대투쟁이나 1987년 7·8월의 노동자대투쟁,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국가에 대한 전면 공격성은 노동운동의 정치투쟁적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신군부 정권하의 노동운동은 살인적·폭력적 억압통제에 대항한 “노조의 대규모 전면공격”이라고 할 만큼 그 투쟁의 성격이 사용자에 대항한 것이라기보다는 “국가에 대항한 성격”이 강한 정치투쟁으로서 자유권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줬다.

결론적으로 1980년대 신군부 정권하의 노동정책은 모든 단결자치의 원칙을 부정했다. 1960년대, 1970년대의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억압과 통제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흐름하에 있었으면서도, 질적으로 강도 높은 살인적·폭력적 억압과 통제였다. 그런 가운데 노동운동은 “노조의 대규모 전면공격”이라고 할 만큼 국가에 대항한 정치투쟁으로 자유권을 지향했다.

노동법 박사 (laborky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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