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다혜 변호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법률사무소 고른)

“이 사건 문서제출명령 신청은 이유 있으므로 문서소지인(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은 이 결정을 받은 날부터 7일 이내에 원고의 재해 관련 판정위 심의회의 회의록 내지 녹취록(녹취파일)을 제출하라.”

법원에서 위와 같은 취지의 명령을 받았다. 질병판정위에서 무슨 논의를 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길이 드디어 열린 것이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업무상 질병 불인정 관련 소송을 진행하며 아무리 판정서와 위원별 의견을 들여다봐도 누가 무엇을 근거로 어떤 심의를 해서 그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록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법원의 문서제출명령에 따라 제출된 심의회의 녹취파일을 들어 보고 깨달았다. 기록돼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실상 심의라고 일컬을 수 있는 행위가 없었던 것이다.

해당 안건에 대한 녹취파일의 길이는 총 1분16초였다. 그중 담당 직원이 심의안을 읽는 데 24초, 마지막에 위원장이 결론을 문장으로 정리하는 데 13초. 나머지 39초 동안 일곱 명의 위원들이 무언가 이야기했다. 그런데 “(특별진찰 결과에 대해) 이게 업무관련성이 높다고요?” “아니요, 이건 개인 질병” “아 그렇습니까?” “선천성 질병입니까?” “그러면 불인정해야지” 등 놀랍게도 이런 말만 가득하다. 물론 39초 동안, 원고에게 선천적인 개인 질병이 존재한다는 점은 산재신청 단계에서부터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다툼 없는 사실이었다.

기존의 질병이 업무로 인해 발현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쟁점인데도 그런 ‘심의’는 부재했다. 재해가 업무와 직접 관련이 없는 기존 질병이더라도 그것이 업무와 관련해 발생한 사고 등으로 말미암아 더욱 악화하거나 그 증상이 비로소 발현된 것이라면 업무와의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법리를 언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이야기는 법원에 가서 하세요.” 최근 질병판정위 심의회의에 위원으로 참석해, 현저히 부실한 재해조사 결과로는 판정을 할 수 없으니 심의를 보류하고 조사보완을 요구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고 있었다. 수많은 판례에서 부실한 조사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그로 인해 야기된 산재불승인 처분이 위법하다고 판단해 오고 있다며, 재해자의 구체적인 직업력도 채 확인이 안 되는 사안을 그냥 심의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자 대뜸 어떤 위원이 의학적 판단을 하는 자리에서 법리 이야기하지 말고 그런 말은 법원에 가서 하라고 말했다. 위원장은 그런 발언을 제지하지는 않고 필자에게 얼른 표결이나 하라며 독촉할 뿐이다. 바쁜 전문가들의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간 여러 회차에 걸쳐 사전에 이메일로, 심의회의에서 계속 지적했지만 표결이 강행됐다.

재해조사의 배타적 권한과 책임을 가진 근로복지공단이 야기한 입증곤란의 상황이 오롯이 재해자에게 불리하게 작동되는 위법한 처분이 반복된 것이다. 재해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사실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사정에 대한 법리 역시 2017년 대법원이 명확하게 밝혔고 이후 법원에서 일관되게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마치 치외법권처럼 법과 법리를 말하는 것이 지탄받는 곳이 오늘날 질병판정위 심의회의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끝내 표결을 하지 않고 회의 참석을 중단하고 뛰쳐나왔다.

행정청의 처분에는 일정한 법적 한계가 있고, 그 법적 한계를 넘은 경우 위법하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상 업무상 질병 판정 절차 등에 관여하는 전문가들이 사인(私人)이라고 해서 법적 한계 없는 무제한의 재량권을 갖는 것은 아니다. 법을 무시한 채 각자가 전문가로서 나름의 판단 재량을 마음껏 발휘하며 결론만 39초간 말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재해자의 구체적인 담당 업무조차 파악하지 않은 채 사업주가 내민 경력증명서 괄호 안에 적힌 부서명 하나로 재해자가 주장하는 사실관계를 일체 배척하는 판단을 할 권능은 ‘전문가’에게 없다. 과연 그런 판단을 바탕으로 한 행정처분이 객관적 정당성을 갖췄다고 누가 생각할 것인가. 그러니 재해자나 유족, 이들을 돕는 대리인께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산재 불승인 사건을 만나면 질병판정위 심의회의 녹취파일을 꼭 확인하시길. 참고로 법원에서는 산재재심사위원회에 대해서도 같은 취지의 문서제출명령을 했다. 법에 따른 판단, 위법하지 않은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을 설득씩이나 해야 한다면, 아니 설득조차 되지 않는다면 감사를 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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