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 기자
▲ 이재 기자

정부가 끝내 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과 방송 3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공사법)을 거부하면서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 대책을 외면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개정 노조법 거부권 행사로 노정관계는 극한 대립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3일 <매일노동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대통령이 국회로 돌려보낸 개정 노조법은 이론적으로는 국회 재의결 절차가 남았지만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을 전망이다. 거부권 행사로 되돌아온 법안을 다시 재의결하려면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이 필요하다. 개정 노조법에 반대하는 국민의힘(112석)이 표결에 참여하면 정족수를 넘기기 어렵다. 실제 이런 이유로 간호법이 재의결에서 부결됐다.

원·하청 교섭 막힌 노동시장 이중구조, 상생협약은 ‘공염불’

노동계는 재의결보다 재발의를 기대하는 모습이다. 박래군 손잡고 상임대표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노란봉투법, 방송 3법만이 아니라 양곡관리법과 간호법을 모두 국회 절차를 거쳐 다시 대통령에게 보내자”며 “총선을 앞두고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을지”라고 썼다. 실제 더불어민주당은 노조법과 방송 3법 개정 재추진을 시사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다시 개정 절차를 밟기는 쉽지 않다. 끝내 개정 노조법 공포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결은 더욱 어려워지게 됐다. 정부는 노사 간 자율에 기반한 상생협약을 내세우지만 효과는 드러나지 않았다. 지난해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하청노동자 파업 이후 노동계를 배제한 원·하청사 간 조선업 상생협의체를 꾸린 고용노동부는 이후 화학산업과 자동차산업으로 이를 확산시키고 있다. 그러나 정작 조선업에서 여전히 노동자의 처우개선은 드러나지 않고 있고, 이주노동자 유입만 확대하고 있다. 심지어 조선업 하청업체 대표가 원청의 기성금 부족을 토로하다가 지난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발생했다. 금속노조에 따르면 원청은 자살한 대표에게 “공정을 마치면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했지만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서 비극적 선택으로 이어졌다. 하청노동자 임금도 주지 못할 정도의 기성금 지급이 반복되면서 하청업체 대표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사채까지 썼지만 끝내 운영을 지속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0월 회사 문을 닫은 그는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20년간 비정규직 죽음에 빚진 노조법 개정안
국회는 차일피일

개정 노조법 추진까지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 특히 3조(손해배상 청구의 제한)는 손배·가압류와 관련해 2003년 배달호(두산중공업)·김주익(한진중공업) 노동자 사망을 시작으로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 등 숱한 생명을 앗아갔다. 쌍용차 파업 당사자들은 현재도 경찰이 제기한 손해배상을 다투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천문학적 손배·가압류에 목숨을 끊는 일이 잇따르자 노동계는 줄곧 노조법 2·3조 개정을 요구했다. 국회에서 이번에 노조법이 통과할 수 있었던 지렛대는 조선하청노동자였다. 지난해 6~7월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의 51일간 파업하면서 노조법 개정 논의에 불을 댕겼다. 이후 9월 이은주 정의당 당시 원내대표가 노조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환경노동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를 구성해 개정을 촉구했다. 운동본부는 지난해 12월 국회 앞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을 벌이고 올해 2월 들어서야 가까스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했지만 또다시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심의를 미루면서 논의가 지연했다. 국회법상 직회부 절차를 밟아 5월 국회 본회의에 올랐지만 이번에는 국회의장이 여야 합의를 요구하면서 상정을 막았다. 상정 후에도 야당의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 위협 등이 있었지만 때마침 이동관 전 방송통신위원장 탄핵과 맞물리면서 본회의 문턱을 넘었다.

대법원 판례 ‘실질적 지배력설’ 수용한 사용자성 확대
내년 총선 핵심 의제로

개정 노조법은 기업규모와 고용형태에 따라 소득과 노동환경이 양극화한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결의 핵심 열쇠다. 노동계가 처음 요구한 원안과는 차이가 있지만 대법원이 판례로 확립한 ‘실질적 지배력설’을 수용해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했고, 근로조건의 결정 관련 분쟁으로 협소했던 노동쟁의 정의를 1997년 외환위기 이전의 권리분쟁으로 환원해 노사가 보다 다양한 사항을 두고 대화를 할 수 있는 길을 텄다. 파업의 책임을 노동자 개인에게 돌려 수많은 노동자를 자살로 내몬 손해배상 책임도 제한했다. 열악한 하청·비정규 노동자가 원청과 대화하면서 갈등을 조율할 수 있도록 한 게 뼈대다. 여기에 민주노총이 올해 중순 국민동의청원 방식으로 입법요구를 한 단체협약 효력확장을 더하면 열악한 중소사업체와 지역 그리고 하청·비정규 노동자의 임금과 근로환경을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공포에 이르지 못한 노조법 개정안은 내년 4월 총선 과정에서 핵심 이슈로 등장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실제로 여론조사에서 원청의 책임을 강화하는 노조법 2조 개정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70.2%로 높게 나오면서 정부여당이 막판까지 거부권 행사 시기를 조율하는 등 여론 눈치를 봤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사태가 한국노총과 정부가 시작한 사회적 대화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한국노총은 거부권 행사가 이뤄진 지난 1일 오후 개최하려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부대표급 회의에 불참했다. 당일 입장문에서 한국노총은 “정부여당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겨우 국회 문턱을 넘었던 노조법 2·3조 개정안을 무산시킨 것에 대한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며 “한국노총은 변함없는 투쟁으로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악과 탄압에 맞서겠다”고 밝혔다. 경사노위는 “일시적 불참”이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경사노위는 오는 14일께 첫 대표자 회의를 열어 노·사·정이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를 정상화할 계획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