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가현 노동활동가

교육이나 행사에 참여하면 소속을 적어야 하는 경우가 잦다. 요새는 소속 칸에 “없음”이라고 적는다. 뭐라도 적어야 하나 뻘쭘하기도 하고, 소속을 적어야 주최측에서 대상자를 파악하고 행사 준비에 편할 텐데 하는 생각도 들지만, 딱히 적을 게 없어서 그냥 없다고 적는다.

그전에는 일하는 곳을 적었다. 다니는 회사가 곧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증명하는 수단이고 정체성이다. 내가 어디에 주로 머무는지, 어디에서 어떤 음식을 먹는지, 자주 가는 곳, 자주 이용하는 교통수단, 생활방식, 주변 인간관계와 같은 일상은 회사를 중심으로 짜인다.

지금 바로 1분 자기소개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 일반적으로는 나이와 직업(또는 학교)이 먼저 튀어나올 것이다. 더 길게 설명한다면 ‘내가 이전에 무슨 일을 했고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다’는 내용처럼 직장을 중심으로 한 설명이 나올 것이다.

남이 해 주는 소개에서도 직장은 중요하다. 정확히는 유가족의 직장과 직책이 중요하다. 부고기사와 부고 접수 경로를 분석한 ‘한국 신문의 단신 부고 제작 관행과 부고 내용분석’ 논문에 따르면, 일반인 부고 기사는 “유족 중심의 편향성과 기업체 임원, 언론계 종사자 중심의 사회 계층적 편향성이 나타났다”고 한다. 심지어 10년 전까지만 해도 고인에게 직함이 없으면 고인의 이름을 쓰지 않는 일도 있었다.

부고 기사 분석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직장을 다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직업과 직장인지가 중요하다. 이와 같은 상황을 반영한 말들이 있다. ‘한 단어로 설명을 못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거르라’는 말이다. 누구나 알법한 일반적인 직업은 짧게 한 단어로 소개할 수 있기 때문에 짧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사기의 가능성이 높은 직업이라는 것이다. 직장인들이 익명으로 의견을 나누는 애플리케이션인 ‘블라인드’에서는 ‘새회사는 믿고 걸러라’는 말이 통용된다. 100명 미만인 회사에서 근무하는 유저는 ‘새회사’라고 표기되는데, 작은 회사에서 근무하는 사람은 익명성을 기반으로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니 블라인드를 통해 사람을 만날 때는 새회사에서 근무하는 사람은 걸러라는 뜻이다.

직장은 고립에 있어서도 중요한 변수다. 최근 있었던 광주청년정책네트워크의 행사에서 안예슬 작가는 “제가 만난 여성 청년들은 취업 시점을 자신의 고립이 끝난 시기로 평가했다. 임금노동의 공백기(실업)와 고립이 연결점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불안정노동과 실업이 고립 상태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회를 보며, 나처럼 지금 직장을 다니지 않고 있는 다른 사람은 소속에 무엇을 적을지 궁금해졌다. 모임이나 동호회를 적으려나. 나처럼 ‘없음’이라 적으려나. 프리랜서라고 적으려나. 소속감이나 고립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려나.

아직은 소속이 없다는 것에 대해 불편함이 있거나 소속을 얼른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진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시간이 지나면 불안감이 생길까. 남들에게 내 소개를 하기 어려워지는 순간이 온다면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 남들에겐 나도 ‘믿고 걸러지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까.

국내 시가총액 200대 기업 직원의 근속기간을 분석한 ESG행복경제연구소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상위 10개 기업의 평균 근속연수는 20.2년에 달한다. 반면에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비정규직의 평균 근속기간은 2년8개월(정규직 8년2개월)으로 1년 미만인 경우(53.3%)가 절반을 넘는다. 길게 일할 수 있는 일자리는 소수다. 고용관계 단절이 반복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데, 다른 사람들은 ‘소속’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노동활동가 (bethemi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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