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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어 기사로 하루 전 배차를 받아 전체 버스노선을 운행하다 뇌출혈로 쓰러진 버스 운전기사에게 법원이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운행 전날 노선을 배정받으며 매일 출퇴근 시간이 변경돼 ‘불규칙 노동’에 놓였고, 이는 만성적 과로에 해당한다는 취지다.

‘과로 기준보다 짧은 근무시간’ 근로복지공단은 산재 불승인

20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5단독(조서영 판사)은 버스 운전기사 A(61)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불승인처분취소 소송에서 최근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A씨는 2017년 4월부터 제주의 여객회사 S사에서 시내·시외버스를 운행했다. 그런데 입사 4개월 만인 그해 11월12일 시외버스를 운전하던 중 두통과 마비가 왔고, 병원에서 뇌출혈을 진단받았다. 이에 요양급여를 신청했지만, 공단은 근무시간이 고용노동부 고시에서 정한 ‘뇌심혈관 질병의 업무 관련성 인정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불승인했다. 공단은 A씨의 뇌출혈 발병 전 4주와 12주간 1주당 평균 근무시간을 각각 45시간1분과 43시간27분으로 추산했다. 과로 기준인 평균 64시간(4주)·60시간(12주)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A씨의 노동강도는 근무시간과 별개로 높은 수준이었다. 2017년 4~8월 일명 ‘스페어 기사(예비기사)’로 근무하며 공백이 발생한 노선을 배정받았다. 전체 17개 노선 중 무려 14개 노선을 운행해야 했다. 게다가 입행 하루 전 노선이 배정됐다. 입사 다음달인 5월부터 4개월간 한 달에 16~22일을 운행한 것으로 파악됐다.

2017년 8월 고정기사로 승격돼 시외버스를 운행했지만, 과로는 계속됐다. 격일로 제주버스터미널에서 서귀포 구 터미널까지 편도 1시간30분을 운전했다. 종점 도착 후 약 15분 정도만 쉰 다음 다시 운행하는 방식을 하루 3~4회 반복했다. 버스 운행을 마치고 회사 숙소에서 잔 뒤 다음날 새벽에 운전하는 날도 일주일에 한두 차례씩 있었다.

“피로 누적 상태에서 격일제 교대근무 투입”

A씨측은 2021년 10월 소송을 내며 이 점을 강조했다. 법원은 A씨 손을 들어줬다. 조 판사는 “원고는 노선조차 충분히 숙달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노선의 버스를 번갈아 운행하면서 높은 긴장상태에 놓였을 것으로 보인다”며 “그 과정에서 상당한 육체·정신적 과로에 노출됐을 것”이라고 판시했다. 법원 감정의(직업환경의학과)도 “업무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데다 여러 노선 운행으로 직무 스트레스가 높은 상황”이라는 취지의 소견을 냈다.

‘고정기사’가 됐을 때도 격일제 교대근무가 과로를 유발했을 것으로 봤다. 조 판사는 “1주일에 한두 번은 집에 가지 못하고 숙소에서 숙박해야 해서 실질적인 근무일수는 일반적인 격일제 교대근무와 같은 14~15일이 아니라 19~20일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특히 “예비기사 근무기간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일반기사로) 다시 근무형태가 변경돼 상당한 강도의 근무를 하게 된 것이 원고에게 과중한 부담으로 작용했을 여지가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법원 감정의 “불규칙한 노동 현저한 상태”

버스기사의 ‘불규칙 노동’에 대한 판단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직업환경의학과 감정의는 “숙박 후 아침 근무 수행, 매일 출퇴근 시간 변경 등의 불규칙한 노동이 현저한 상태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과로로 볼 만한 질적 요소가 다수 있었다는 것이다. 불규칙 노동은 사고 위험을 높인다는 연구결과도 뒷받침했다. 조 판사는 “과중한 업무로 인한 육체·정신적 과로가 누적돼 뇌혈관의 정상적인 기능에 영향을 미쳤고 이 사건 상병이 발병하게 된 것으로 추정함이 상당하다”고 결론 내렸다.

A씨를 대리한 김용준·김위정 변호사(법무법인 마중)는 “민원응대와 감정노동 업무가 많은 버스기사는 직무 스트레스가 높은 직종”이라며 “교대근무와 불규칙한 근무일정 등이 더해져 사고 당시 60대에 가까운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뇌출혈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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