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ILO

윤석열 대통령이 국제노동기구(ILO) 탈퇴를 운운했다는 언론기사가 보인다. 탈퇴가 아니라 ILO 협약 100호와 111호의 비준을 철회하려는 의도라는 분석도 보인다. 외국인 노동자나 저임금 내국인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의 차별을 허용해 달라는 자영업자나 영세사업주의 요구를 고려해서라고 한다.

ILO 협약 100호는 남자 노동자와 여자 노동자가 같은 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할 경우 같은 임금과 처우를 보장하라는 내용이다. 1951년 채택된 협약 100호는 2차 세계대전 같은 전쟁의 산물이다. 전쟁으로 남자들이 군인으로 동원돼 전장에 나갔고, 그 결과 전시경제를 가동하는 데서 노동력 부족 문제가 대두됐다. 후방에 남은 노동력인 여성을 노동시장에 끌어들이기 위해 남자와 같은 임금과 처우를 보장하겠다고 각국 정부가 나섰던 시대 분위기가 협약 채택의 원동력이 됐다.

많은 이들이 협약 100호를 ‘동일가치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협약으로 소개하지만, 그 조항을 자세히 읽어 보면 ‘동일가치노동’(labour of equal value)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동일가치근로’(work of equal value)라는 말이 나온다. 다시 말해 근로, 즉 일의 가치가 동일할 경우 동일한 임금과 처우를 보장하라는 말이다.

인간의 노동은 사람마다 다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동할 수 있는 능력, 즉 노동력(labour power)이 사람마다 다르다. 여성 노동과 남성 노동이 다르고 아동 노동과 성인 노동이 다르고 저학력 노동과 고학력 노동, 외국인 노동과 내국인 노동이 다르다. 노동이 다르더라도 노동을 수행해 실현된 일의 가치가 동일하다면 노동의 차이에 상관없이 동일한 임금과 처우를 제공하는 것이 협약 100호의 주된 내용이다.

협약 100호와 짝을 이루는 게 1958년 채택된 협약 111호다. ‘고용과 직업에서의 차별금지’라는 제목을 단 협약 111호는 인종, 피부색, 성, 종교, 정치적 견해, 국적, 사회적 출신을 이유로 고용과 직업에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협약 111호는 전문에서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고 천명한 ILO의 필라델피아 선언(1944년 채택)을 언급하고 있다. 필라델피아 선언은 인종·신념·성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유와 존엄, 경제적 보장, 평등한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천명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영삼 정권 시절인 1997년 12월8일 협약 100호를, 김대중 정권 시절인 1998년 12월4일 협약 111호를 비준했다. 올해 10월31일 현재, ILO 회원국 187개국 가운데 협약 100호를 비준한 나라는 174개국, 협약 111호를 비준한 나라는 175개국이다. 더군다나 두 협약은 회원국 정부의 비준 여부에 상관 없이 모든 나라와 모든 사업장에서 실현해야 하는 ‘기본협약’(Fundamental Conventions)에 속한다. 무엇보다도 ILO의 기본협약은 그 자체로 국제연합(UN) 기준의 지위를 차지하며, 윤석열 대통령이 좋아하는 ‘규칙에 기반한 국제질서’(rule-based international order)의 근간을 이룬다.

정체도 불분명한 자영업자와 영세사업자를 핑계로 사반세기도 전에 대한민국 정부가 비준했고, ILO 회원국 대부분이 비준을 마친 국제노동기준에 시비를 거는 윤석열 정부의 졸렬함을 비웃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이나 쿠데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ILO 협약 탈퇴 운운하는 그의 바람은 그가 약속했던 다른 수많은 포퓰리즘 정책처럼 허공 속으로 사라질 게 분명하다.

윤효원 객원기자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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