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간부 교육을 위해 태국에 왔다. 마지막 사업이 2012년 무렵이었으니, 개인적으로 십 년 만에 이뤄지는 태국 활동이다. 당시 태국은 기업별노조주의의 극단적 사례였다. 기업별노조와 산별연맹의 연결은 체계적이지 않고, 산별연맹과 총연맹의 연계도 혼란스러웠다. 조합원수는 50만명도 되지 않아 노동조합 조직률은 1~2% 수준이었다.

산별연맹과 총연맹의 체계적인 지원이 없다 보니, 기업별노조는 전적으로 자기 역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조합원수가 300명은 넘어야 그럭저럭 현장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노조활동에 대한 사용자의 간섭과 침해는 일상적으로 이뤄졌지만 기업별노조의 일상 현장활동은 지속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신규 사업장의 기업별노조 설립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 됐다.

국제노동기구(ILO)의 아시아사무소가 방콕에 있지만, ILO가 채택한 국제노동기준의 실현은 태국에서 요원한 일이었다. ILO가 사회적 대화를 표방했지만, 노사정 3자 관계의 대등성이나 노동조합의 투쟁성을 전제로 하는 사회적 대화가 의미있게 성사될 리 만무했다.

십 년 전 노동조합법은 조직화나 단체교섭 같은 노동조합의 활동을 촉진하고 지원하는 법이 아니었다. ILO 87호 결사의 자유 협약과 98호 단체교섭권 보장 협약을 주제로 방콕의 호텔에서 수많은 세미나가 열렸지만, 두 협약의 비준은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노동조합운동은 왕당파(Yellow Shirts)와 반왕당파(Red Shirts)로 나뉘어 내부 갈등을 거듭하고 있었고, 지도부의 단결과 협력은 이뤄지지 않으면서 극도의 분열상을 보였다.

십 년 전 마지막 노동교육 주제는 ‘산별노조운동’이었다. 당시의 운동적 장벽을 돌파할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전략으로 기업별로 쪼개진 노조를 산업별로 전환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때마침 태국 노동조합운동에서 가장 안정된 조직력을 보여준 자동차와 전자 부문을 주력으로 하는 태국제조업노조연맹(CILT) 지도부가 “일본식 기업별노조”가 아닌 “한국식 산업별노조”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내가 책임을 맡았던 노동교육 프로젝트의 계획이 바뀌면서 2012년을 마지막으로 태국 활동은 중단됐다.

십 년 만에 온 태국 분위기는 그때 모습 그대로였다. 교육장소로 이동하면서 살핀 거리 풍경엔 큰 변화가 없었다. 2012년 5천748달러였던 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22년 7천498달러로 10년 동안 30.4%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국은 6천301달러에서 1만2천814달러로 103.4% 증가했다. 개발도상국인 태국의 GDP 성장률은 약세를 지속했고, 그 와중에 왕당파 군부의 쿠데타를 겪었다.

이번에 태국제조업노조연맹과 함께 하는 노동교육에는 중견 노조 간부 20명이 참석했다. 절반은 기업별노조의 전임간부, 나머지 절반은 비전임간부다. 이들에 따르면 지난 십 년간 조합원수는 늘지 않아 1천400여개의 기업별노조 50만명 안팎으로 정체된 상태다. 기업별노조의 평균 조합원수는 358명으로, 이 숫자는 지속가능한 노조활동을 위한 일종의 문턱으로 판단된다.

태국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제조업노조연맹의 조합원수는 7만명으로 70개 기업별노조에 속해 있다. 제조업노조연맹 산하 기업노조의 평균 조합원수는 1천명으로, 전체 평균보다 3배 많다. 제조업노조연맹의 상대적인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은 자동차와 금속 부문 대기업에 기반한 기업노조를 가맹조직으로 거느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태국 노동운동이 정체해 있지만, 다행인 것은 제조업노조연맹 지도부가 여전히 산별노조로의 전환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식 모델’을 강조하는 인사말을 들으면서 ‘산별노조운동’(industrial unionism)이 태국만이 아니라 ‘기업별노조운동’(enterprise unionism)에 발목 잡힌 아시아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전략임을 명심하게 된다.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기업별노조에서 산별노조로 전환한 경험이 있는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실패담과 성공담은 아시아 노동조합운동의 침로를 밝혀줄 소중한 실천적 교훈이다.

윤효원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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