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동료들이 떠나지 않는 노동환경을 만들고 싶어요. 책이 너무 좋은데 여기서 살아남지도 버텨내지도 못하겠다는 동료들을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어요.”

안명희(49·사진)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장은 지난 16일 지부 총회를 거쳐 재선했다. 1년 임기인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장이 통상 노조 출판노동조합협의회 의장도 맡는 만큼 의장 임기도 1년 연장됐다. 협의회는 창비·한겨레출판 같은 사업장별 지부와, 서울·경기지역에서 노조가 없는 출판사에 재직 중인 노동자와 프리랜서 등이 가입한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를 포괄한다.

안명희 의장은 지난 임기 동안 ‘2023 출판노동 요구안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대한출판문화협회를 상대로 처음 산별교섭을 요구했다. 안명희 의장은 “조합원들이 변화를 바란 것 같다”며 “지난 1년이라는 시간은 이를 이루기엔 시간이 짧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매일노동뉴스>는 지난 21일 오후 서울 합정역 근처에서 안명희 의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노조설립조차 어려운 업계
노동조건 올리려면 산별교섭 필요”

정기훈 기자
정기훈 기자

- 지난 6일 국내 4천여개 회원사가 가입한 대한출판문화협회를 출판계 사용자단체로 지목하고 산별교섭을 요구했다.
“출판사에서는 노조활동을 하기 어렵다. 노조가 만들어져도 없어지는 과정이 반복됐다. 노조가 있는 사업장은 7곳뿐이다. 회사 안에서 나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보다 이직을 하면서 연봉을 높이는 방향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5명 미만 사업장이 많아서 근로기준법 사각지대에 놓여 있고, 외주 비율이 높아지면서 프리랜서가 늘어나는 것도 원인이다. 결국 업계 전체 노동조건을 올려야 하고, 노동조건의 기준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산별교섭이 필요한 이유다. ‘책이 싫어질까 봐 떠난다’는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 교섭 요구에 협회쪽은 어떻게 반응했나.
“지난 20일 확인을 해 보니 ‘상임이사회에서 논의를 했는데 사용자단체가 아니다. 사업주의 이익을 추구하는 단체다. 교섭 의무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공문으로 답변을 다시 요청했고 이달 말까지 답변을 달라고 한 상태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노사정 협의체 구성을 요구했지만 이렇다 할 답변을 주진 않았다.”

“재직노동자는 포괄임금제 때문에
외주노동자는 낮은 작업단가 탓에 장시간노동”

협의회는 지난 6월 국회에서 출판사 재직·외주 노동자 51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3월22일~4월10일) 결과를 발표했다. 응답자 47.3%가 연봉 3천300만원 이하를 받고, 외주노동자의 경우 10명 중 6명이 최저임금 이하를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재직노동자 10명 중 8명은 연장·야간·휴일근로에 따른 수당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언론노조와 협의회는 이달 13일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근로감독 청원서를 접수했다.

“윤철호 대한출판문화협회장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노동시간이 너무 길면 책을 읽을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정작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무한대로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재직노동자는 포괄임금제 때문에, 외주노동자는 작업단가가 낮아 업무량을 늘릴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인 탓입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낸 2021 출판산업 실태조사(2020년 기준) 자료를 보면 출판사업체 현황에서 출판 매출액이 감소했다는 응답이 절반(51.6%)에 가까웠다. 영업이익률은 감소했다는 응답(38.8%)과 유지하고 있다(35.8%)는 응답이 비슷하게 나타났다. 종사자 증감은 유지가 89.1%로 가장 많았고, 감소의 경우 6%였다. 외주 작업 현황은 28.2%였다.

“외주노동자가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재직자는 최저임금을 적용받아서 조금이라도 임금이 오르지만 프리랜서인 외주노동자 작업단가는 수년째 오르지 않고 있어요. 재직노동자와 외주노동자 간 임금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죠. 외주노동자 작업단가를 책정할 때 경력도, 업무 난이도도 고려되지 않고 관행적으로 책정되는 경우가 많아요. 주먹구구식으로 정해지는 데다 오르지 않고, 이마저 체불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어요.”

“노조도 출판계 주체로 목소리 낼 것”

정기훈 기자
정기훈 기자

- ‘요즘 시대 누가 종이책을 읽냐’는 말이 나온 지도 오래됐다. 업계 불황은 노동환경 개선에도 걸림돌로 작용할 텐데.

“이윤을 내는 방법이 종이책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업계는 2차 저작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새로운 수익구조를 만들어 가고 있다. 출판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말하면 ‘종이책이 안 팔려서 어렵다’는 이야기만 한다.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도와 기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편집자를 비롯한 출판노동자를 쥐어짜는 구조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 출판 시장 변화가 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지.

“플랫폼을 포함해 중개업체, 중간업체가 많이 생겨나면서 편집·번역·디자인 등 업무를 하는 외주노동자 입장에서는 직접 출판사와 계약할 때와 달리 중간 수수료를 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적게는 10%에서 많게는 40%까지 떼 가기도 한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구인 비용도 아끼고 사용자책임을 질 필요가 없게 된다.”

- 출판노동자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필요한 법·제도는.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이 필요하다. 근기법 적용을 5명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해야 한다. 출판업계도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안착한 상황이어서 ‘진짜 사장’ 찾기 문제가 불거지는 만큼 사용자·노동자 정의 확대도 필요하다. 또한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한 법률(예술인권리보장법), 예술인복지법을 적용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술인 고용보험에서 출판 종사자들은 적용 대상이 아니고, 예술인복지법상 예술인에도 속하지 않는다. 출판업계 외주노동자는 여성 비율이 높은데, 출산 등으로 일을 할 수 없을 때 실업급여라도 받을 수 있게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 정부가 출판·도서 관련 지원 예산을 삭감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 있는지.

“노조활동의 목적은 노동환경 개선을 통해 결국 좋은 책을 만들고자 하는 데 있다. 출판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나 예산삭감 문제가 앞으로 계속될 수 있는데 노조도 출판계 주요 주체로서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 출판계 발언권은 사업주에 쏠려 있는데, 출판계를 지켜 온 노동자들도 주체로 나서야 한다. 정부를 향해 노조와 사용자단체인 협회가 한목소리를 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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