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개헌국민연대 등이 지난달 31일 국회 앞에서 비례대표 의석 확대 등 선거제도 개혁을 촉구하고 거대양당 밀실야합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진보정당들이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선거제도 때문이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21일까지 거대 여야에 20대 국회의원 선거 때와 다르지 않은 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로 선거제도를 합의할 것을 주문했다고 알려졌다. 열쇠를 쥔 더불어민주당은 위성정당 창당 방지와 연동형 비례대표제 원칙을 주장해 왔지만, 최근 원내지도부에서 병립형을 검토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민주당 내부 상황을 고려하면 국회의장안으로 합의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국회의장안으로 결정되면 진보정당의 생존은 보장할 수 없게 된다. 지금 선거제에서는 13석이 가능하지만 병립형 비례대표제가 적용되면 진보정당 의석수는 모두 합쳐 겨우 2석 정도로 쪼그라들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준연동형’ 주장하던 민주당
‘병립형 권역별 비례대표제’도 함께 논의

현재 선거제 논의는 국민의힘·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와 정치개혁특별위원회 간사로 이뤄진 ‘2+2 협의체’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양당은 지역구는 지금과 같은 소선거구제로 하고, 비례대표는 전국을 북부(수도권)·중부·남부 3개 권역으로 나누는 ‘지역균형비례제’를 도입하는 것까지 합의한 상황이다. 영남과 호남, 충청과 강원·제주의 경계를 허물고 동과 서를 아우르는 지역통합 선거구를 운영하는 방안이다.

문제는 비례대표 방안이다. 국민의힘은 20대 총선 방식인 병립형 비례대표제를 주장한다. 민주당은 지역구는 현행대로, 비례대표는 권역별·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뽑는 방식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처럼 전국을 대상으로 비례대표를 뽑는 게 아니라 권역별로 비례대표를 뽑는 방식이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역구 의석수가 비례대표 수에 연동된다.

비례대표 방안에 양당은 아직 이견을 좁히지 못한 상황이다. 다만 김진표 국회의장이 21일까지 병립형 권열별 대표제 합의를 제안했다 알려지고, 민주당 내부에도 이를 검토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지난 14일 오전 민주당은 의원총회를 열고 선거제도 개혁에 대해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위성정당을 안 만들겠다고 약속할 경우, 국민의힘에 다수당을 빼앗길 수 있다는 현실론과 원칙을 지키자는 원칙론이 부딪혔다. 민주당은 지난해 2월 지역구 득표율과 정당득표율을 연계해 비례 의석을 배분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당론으로 채택한 바 있다.

이소영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이날 의총 직후 기자들과 만나 “병립형으로 회귀하는 건 국민과 약속을 어기는 측면이 있다는 부분을 여러분이 지적한다”며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병립형으로 회귀하는 것은 현재까지 민주당 입장은 분명히 아니다”고 강조했다.

정의당, 중부 권역에선 3% 어려울 듯
“비례대표 1~2석에 그칠 가능성 커”

민주당이 현재 상황은 병립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강조했지만, 진보정당의 판단은 다르다. 한 진보정당 관계자는 <매일노동뉴스>와 통화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간다면) 민주당은 위성정당 없이 의석을 더 창출하기 어려운 상황이고, 지도부와 갈등하는 세력이 위성정당을 만들고 이탈할 수 있기 때문에 민주당 지도부가 병립형을 주장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며 “병립형이 될 가능성을 상수로 보고 전략을 짜고 있다”고 밝혔다.

병립형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된다면 진보정당이 얻을 비례대표는 1~2석 수준이 될 것으로 진보정당들은 판단한다. 정의당이 지역색이 뚜렷한 정당이 아니지만 특히 중부지역에서 정의당을 지지하는 세력이 저조하게 나오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비례대표 의석을 받기 위한 최소기준인 정당득표율 3%를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다.

북부 권역은 서울·경기·인천, 중부는 대구·경북·대전·충청·강원, 남부는 광주·전라와 부산·울산·경남으로 묶이게 된다. 한국갤럽이 지난 15일 발표한 2023년 9월 둘째주 여론조사를 들여다보면 정의당 지지도는 전체 5%다. 북부인 서울, 인천·경기는 4%를 기록했다. 중부로 묶이는 대전·세종·충청과 대구·경북은 모두 3%였다. 남부로 묶이는 광주·전라가 12%, 부산·울산·경남이 6%를 기록했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민주당·진보정당·노동·시민사회
‘다당제 정치개혁’ 한목소리

진보정당을 포함한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은 한목소리로 “표의 비례성을 높여 민의를 더 잘 반영할 수 있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위성정당 발생이 걱정된다면 양당이 함께 위성정당 방지를 선언하면 될 일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양당이 위성정당을 창당하지 않고 현 제도로 선거를 치른다고 가정하면 진보정당들의 외연은 확대될 수 있다. 정의당이 현재 지역구에서 지지율만큼 득표한다고 가정하면 비례대표 47석 중 30석이 정당득표율과 절반만 연동되는 준연동형 비례에서 11석, 기존과 방식으로 뽑히는 17석의 병립형 비례에서 1석, 지역구 1석을 얻어 13석이 될 수 있다. 20대 총선 결과를 대입하면 지역구 2석에 준연동형 비례대표 13석, 병립형 비례대표 2석으로 17석을 얻게 된다.

경실련은 지난 15일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구성한 선거제 개편 협의체에 질의서를 발송했다. 비례대표제 확대, 비례대표제 선출 방식, 지역구 의원 선출 방식에 대한 양당의 입장을 묻는 내용이다. 국회 본회의가 열리는 21일 전날인 20일까지 회신을 요청했다. 경실련은 “본회의를 통해 양당이 소선거구제, 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를 내용으로 한 선거제 개혁안을 처리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린다”고 비판하며 “구태 정치를 혁파하고 민생 국회를 만들기 위해 정당 정책과 후보자 검증 운동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노총과 진보4당은 지난 13일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강화와 선거제도 비례성 및 대표성을 강화해 다당제 연합정치로 바꾸기 위해 공동 대응하며 △선거제 개혁 논의에 비교섭단체와 원외정당 의견 반영 △민주당이 선거제 합의시 강력 공동 대응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민주당이 현실론과 원칙론 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서 9월 정기국회에서도 선거제 처리는 어려울 전망이다. 논의가 계속해서 공전할 경우 기존 선거제도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내년 총선을 치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공직선거법상 선거 1년 전인 4월10일까지 선거제도를 정했어야 했지만 협상이 길어지며 기한을 5개월여 어긴 상황이다. 통상적으로 선거제도 합의는 선거 40여일을 앞두고 타결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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