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민단체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가 지난 19일 전태일기념관에서 진행한 9회 노란봉투법 모의법정 경연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변론하고 있다. <홍준표 기자>

“노조도 아닌 지부장 개인에게 470억원이라는 막대한 손해를 배상하라는 요구를 하는 자가 어떻게 ‘노사협력’을 원하는 사용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하청·도급이라는 복잡·다층한 제도 속에서 결정권자인 오성제철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고, 하청노동자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교섭 상대방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 법원이 기존의 판례에 얽매이기보다는 이들의 근로 3권과 헌법상 권리를 되찾아 줄 때입니다.”

‘산재 제철소 손해배상 소송’을 주제로 하는 가상의 법정에 선 고려대 로스쿨팀(팀장 김성욱·손효유·김민혁)의 최종변론이다. 이들은 “실질적 결정권이 없는 자에게 아무리 불만을 토로해 봐도 제대로 된 개선책을 들을 수 없는데도 왜 우리 사회는 하청노동자에게만 실질적인 결정권자와의 교섭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산재 제철소’ 하루 파업에 470억원 손배소

고려대 로스쿨팀은 시민단체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가 민주노총·한국노총과 공동주최로 지난 19일 전태일기념관에서 진행한 9회 노란봉투법 모의법정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 대회는 역대 최다인 90명(30팀)이 참가했다. 7월14일 예선을 치른 후 8팀이 본선에 올랐다. 수상은 △국회의장상(상금 300만원) 고려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상(200만원) 성균관대 △민주노총법률원장상(100만원) 성균관대 △한국노총법률원장상(100만원) 서강대 △노란봉투법상(50만원) 한양대·고려대·서울시립대·연세대에 돌아갔다.

대회 문제는 ‘산재 사업장의 단체교섭 거부로 인한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이 다뤄졌다. 실제 사건인 ‘현대제철’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교섭요구를 따왔다. 출발점은 가상의 제철소 ‘오성제철’에서 크레인 충돌사고로 사내하청 노동자 1명이 사망하고 원청노동자 4명이 부상을 입은 사고다.

정규직으로 구성된 ‘오성제철지부’와 사내하청 노조인 ‘연심인더스트리지회’는 사업장 안전과 하청노동자 임금을 두고 오성제철에 공동교섭을 요구했다. 하지만 오성제철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사용자가 아니라며 중앙노동위원회 판정에 불복해 단체교섭을 거부하면서 행정소송을 냈다. 지부는 조합원이 거수해 찬성하는 방식을 통해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그런데 파업 하루 만에 정전이 발생했고, 고장난 발전기를 수리할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출근하지 않자 제철소 가동이 중단됐다. 지부는 전면파업을 중단하고 하루 만에 출근해 공장이 재가동됐다. 제철소측은 하루 동안의 공장가동 중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지부장과 신원보증인에게 470억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손배 책임 제한·파업 정당성’ 공방 치열

쟁점은 △쟁의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의 제한 △쟁의행위의 정당성 △원청의 교섭의무 여부였다. 모두 국회에서 논의 중인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3조 개정안과 맞물려 있다. 모의법정은 열기가 뜨거웠다. 조합원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쟁의행위가 불법에 해당하는지 등에 대해 원·피고가 첨예하게 부딪쳤다.

원고는 절차를 위반한 위법한 파업에다 파업으로 손실을 입었다며 지부장과 신원보증인에게 연대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피고는 “지회 조합원 14명이 10년간 산재로 사망했는데, 하청에 단체교섭을 요구해도 개선되지 않는다”며 “실질적인 의사결정권자인 원청에 교섭의무가 있다”고 맞섰다.

오전 9시부터 약 200분간 재판부의 날카로운 질문에 진땀을 흘리는 팀도 있었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박은정 인제대 교수(법학)는 “모든 팀이 쟁점과 관련 없는 ‘공동교섭’이라는 출제자가 판 함정에 빠졌다”며 “단체교섭의 목적과 쟁의행위 정당성에 초점을 맞춘 팀에 높은 점수를 부여했다”고 평가했다.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생 김민혁(27·왼쪽부터)씨, 손효유(23)씨, 김성욱(29)씨가 지난 19일 오후 9회 노란봉투법 모의법정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인 국회의장상을 수상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홍준표 기자>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생 김민혁(27·왼쪽부터)씨, 손효유(23)씨, 김성욱(29)씨가 지난 19일 오후 9회 노란봉투법 모의법정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인 국회의장상을 수상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홍준표 기자>

우승팀 “개인에 손배 책임 전가 안 돼”

고려대 로스쿨팀은 최우수상이 확정되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특히 팀 구성이 모두 1학년으로 이뤄져 기본법보다 ‘노동법’을 먼저 접했다고 입을 모았다. 팀장인 김성욱(29)씨는 “학교에서 접하지 못하는 실무를 경험해서 뜻깊었다”며 “로스쿨 입학 전 다니던 회사에서 퇴사할 때 인사팀과 대화하며 노동자 권리를 찾기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해 노동법에 관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수백억 원대 손해배상이 노동자를 옥죄는 도구로 활용된다는 사실이 체감된다는 소감도 이어졌다. 시상식에서 한참을 울먹인 김민혁(27)씨는 “문제를 받았을 때는 손해배상액 470억원이 와닿지 않았는데, 공부할수록 ‘개인이 살면서 만져본 적 없는 엄청난 금액을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무겁게 다가왔다”고 했다.

이들은 노란봉투법이 국회에서 통과돼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팀 막내인 손효유(23)씨는 “노동자 개인에 대한 손해배상은 (제한하는) 입법이 됐다면 애초 발생하지 않았을 문제”라며 “대법원 판례와 헌법재판소 입장도 다르다 보니 사용자와 노동자 모두 혼란스럽지 않았겠느냐”고 짚었다. 이들은 쟁의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민혁씨는 이렇게 말했다. “모의법정에서 바라본 현실은 더 가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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