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유 노동운동 역사탐방’ 참가자들이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에서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연윤정 기자>

8·15 광복절을 사흘 앞둔 지난 12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은 이곳을 찾은 국내외 관람객들로 북적북적했다. 4.5미터 높이의 낡고 바랜 붉은색 담장에 둘러싸이고 10미터 높이의 망루 6개에서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을 감시했을 옛 서대문형무소. 35년간의 일제강점기를 끝내고 광복을 맞았지만 이곳에서는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더 많았으리라.

광복절 78주년을 기념해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최승회)와 ㈔소통과혁신연구소(소장 정성희)가 이날 서대문구 일대에서 ‘이재유 노동운동 역사탐방’을 주최했다.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 회원과 보건의료노조 조합원, 금속노조 서울지부·현대차지부 조합원, 고 김금수 선생 유가족 등 30명이 참가했다. 정성희 소장과 최창우 역사사랑모임 대표가 안내를 맡았다. 이재유 선생의 발자취를 통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노동운동, 광복의 의미를 돌아보고자 마련했다.

일제에 대한 저항 늘수록 감옥도 늘려

“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의해 1908년 1월21일 경성감옥으로 개소됐다. 개소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근대식 감옥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맞서 싸운 한국민을 저지하고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민에 대한 억압과 처벌의 장소로 이용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순국했으며, 광복 이후에는 독재정권에 의해 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이 수감돼 고난을 치렀던 곳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전시관에 소개돼 있는 글이다. 일제에 저항해 수감된 인원이 늘자 일제는 1912년 마포 공덕동에 대규모 감옥을 신축하고 이곳을 경성감옥으로, 기존 경성감옥을 서대문감옥으로 각각 칭했다. 서대문감옥은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바뀌었다. 독립운동에 따른 ‘사상범’ 급증으로 증·개축을 거듭해 1930년에는 개소 당시보다 30배 이상 규모가 확대됐다.

최창우 대표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다음날 여운형 선생 입회하에 이곳에 있는 요샛말로 양심수, 즉 정치수와 경제사범이 전면적으로 석방됐다”며 “어떤 기록에 의하면 폭포수처럼 사람이 쏟아졌다고 한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 문으로 쫙 나오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덧붙였다. 어떤 모습이었을까. 참가자들은 서대문형무소 정문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전시관 2층에 조성된 ‘경성트로이카’ 부스. <연윤정 기자>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전시관 2층에 조성된 ‘경성트로이카’ 부스. <연윤정 기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경성트로이카’

1930년대 좌익운동의 신화 혹은 당대 최고의 혁명가라 불렸던 이재유. 일제의 폭압 속에서 경성트로이카를 조직해 항일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경찰에 체포됐다가 탈출에 성공하며 은신과 변장술로 번번이 검거망을 뚫어 ‘신화적 인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런 이재유도 최후의 검거를 피하지 못했다.

“1928년 11월 해체됐던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1933년 이재유·이현상·김삼룡 등이 주축이 돼 ‘경성트로이카’를 조직했다. 이 조직을 중심으로 학생·노동자·농민들을 규합해 서울·경기 각지에서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전개해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했다. 그러나 1934년 일경의 대대적인 검거로 120여명의 조직원이 체포돼 조직이 와해됐다. 이후 이재유의 지도하에 경성콤그룹, 경성준비그룹 등으로 이어지면서 지속적인 노동운동을 진행했다. 이재유는 1936년 12월 창동역에서 잠복 중인 일경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청주형무소로 이감, 1944년 옥사 순국했다.”

역사관 전시관 2층에 조성된 ‘경성트로이카’ 부스의 소개글이다. 이 부스에는 이재유·이현상·김삼룡 이외에도 이관술·이순금·박영출·미야케 시카노스케·박진홍·이병희·이효정 등 경성트로이카 주요 인물들도 함께 소개돼 있다. 이 중 경성제국대 교수였던 미야케는 이재유 선생의 은신을 도왔다가 나중에 발각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인물이다.

서대문경찰서에서 두 번째 탈출에 성공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 지하고문실과 각 옥사를 둘러본 참가자들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나와 도보로 옛 서대문경찰서 터가 있는 현재 서울적십자병원 앞으로 이동했다. 이동 중에 마주친 ‘경기중군영터’ 역시 일제와 밀접한 곳이다. 1880년 일본공사관으로 사용되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조선 군인들에 포위되면서 일본이 스스로 불을 지르고 탈출했다.

그 뒤 일본은 교동에 새 공사관을 지었지만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또다시 불타 없어졌다. 1893년 예장동에 서양식 공관을 완성했다. 일본인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정착했다. 최창우 대표는 “일본인은 사대문 안에 거주할 수 없었다”며 “하지만 공사관이 잇따라 불타면서 일제는 결국 사대문 안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옛 서대문경찰서가 위치했던 서대문역 근처에 도착했다. 자주 지나치던 곳이지만 전혀 짐작조차 못했던 위치였다. 지금의 서대문경찰서는 길 건너 경찰청 옆으로 옮겼다.

1933년 종연방직을 비롯해 서울 주요 기업에서 연쇄적으로 파업이 일어났다. 이재유와 경성트로이카와 깊은 연관이 있다.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펴낸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에 따르면 1933년 9월 종연방직 파업 이후 서울의 공장가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경찰의 검거 열풍이 몰아쳤다. 은신에 들어갔던 이재유는 1934년 1월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됐다. 그해 3월 서대문경찰서에서 탈출했지만 잡혔다가, 4월 다시 탈출에 성공한다.

▲서대문형무소 옥사 모습. <연윤정 기자>
▲서대문형무소 옥사 모습. <연윤정 기자>

항일 노동운동을 지원한 미야케 교수

“1933년 1차 탈출을 한 뒤 지금의 경향신문 쪽으로 탈출했어요. 담을 뛰어 가보니 미국영사관이었는데, 미국영사관측의 신고로 다시 연행됐죠.”

정성희 소장의 설명이다. 이재유는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된 뒤 1차 탈출을 해서 경향신문에서 꺾어져 정동길로 들어섰다. 이미 경찰의 추적 소리가 요란해 어떤 담을 뛰어넘었는데 그곳이 미국영사관이었다. 지금의 정동극장이 위치한 자리다. 옛 경성재판소(현 서울시립미술관) 앞에 위치했다.

참가자들은 이재유가 탈출했던 경로를 따랐다. 서대문경찰서 터에서 서울적십자병원과 4·19혁명기념도서관, 성균관대병원에서 길 건너 경향신문 앞으로 지나 정동길로 접어들어 정동극장 앞에 멈췄다. 최창우 대표는 이를 ‘이재유의 길’이라 칭했다.

“(종각 의금부에서 출발해 전남 남원까지 이어지는)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길’이라고 있습니다. 이재유 선생이 서대문경찰서에서 탈출해 미국영사관까지 갔는데 그 길을 ‘이재유의 길’로 이름 짓고 우리가 왔다 갔다 해야 그게 예의가 아닐까요. 우리의 길을 개척해야 합니다.”

다시 서대문경찰서로 잡혀 온 이재유는 가혹한 고문에 시달렸다. 하지만 한 달 뒤 2차 탈출에 성공했다. 이때 이재유에게 감화한 모리타라는 일본인 순사의 암묵적인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탈출에 성공한 이재유는 지금의 대학로 근처에 위치한 동숭동 미야케 교수 관사로 향했다.

▲ 이재유 선생이 서대문경찰서에서 2차 탈출에 성공한 뒤 찾아가 38일간 은신했던 미야케 교수 관저가 있던 자리. <연윤정 기자>
▲ 이재유 선생이 서대문경찰서에서 2차 탈출에 성공한 뒤 찾아가 38일간 은신했던 미야케 교수 관저가 있던 자리. <연윤정 기자>

“노동현장으로, 변혁적 대중노선 이재유”

참가자들은 정동극장 앞에서 옛 경성재판소가 있던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건물은 1928년에 경성재판소로 건립된 법원 건물로, 광복 후 대법원청사로 사용됐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총독이던 사이토 마코토의 글씨로 확인되는 ‘정초(定礎)’석이 남아있다. 이재유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다.

참가자들은 이어 종각역으로 이동해 박진홍·이순금·이효정·이종희·이경선 등 여성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옛 동덕여고가 있던 동덕빌딩 앞에 들렀다가 마지막 일정인 미야케 교수 관사가 있는 대학로로 향했다. 미야케 교수의 관사 자리엔 현재 일석기념관이 들어섰다.

탈출 뒤 자신을 찾아온 이재유를 일본인 공산주의자 미야케 교수는 자신의 집 다다미방 바닥에 토굴을 파서 38일간 숨겨줬다. 이 도움으로 이재유는 무사히 도주할 수 있었고, 2기 트로이카 운동에 나섰다. 미야케 교수는 나중에 발각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이번 탐방에서는 당초 예정했던 이재유가 주거했던 연건동-동숭동-신설동 빈민촌과 최후의 은신과 활동, 체포된 창동-녹천역은 시간 관계상 방문하지 못했다.

해방된 지 78년이 지났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은 여전히 암울하다. 분단이 이어지며 한반도 평화는 날이 갈수록 위태롭기만 하고, 비정규직 차별과 노조운동 탄압으로 노동자 대중의 생존권은 위협받고 있다. 이재유 선생이 발자취를 통해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무엇일까.

정성희 소장은 “이재유 선생은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결합하고, 노동자 대중이 주체가 되는 변혁적 대중노선을 가졌다”며 “철저한 이론과 실천을 결합하는 활동가의 자세를 보이면서 체포와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혁명투사와 신념의 강자였다”고 평가했다.

글·사진=연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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