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진일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대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무서울 정도의 더위가 지나니 이번에는 태풍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이 폭우와 폭염, 재앙적 산불 같은 기후재난으로 신음하고 있다. 질병관리청의 온열질환 응급실감시체계 기록을 보면 올해 들어 지난 7일까지 온열질환자는 1천984명이며 추정사망자는 27명이다. 아직 기록 마감이 2개월 가까이 남은 시점에서 이미 지난해 기록(질환자 1천101명, 추정사망자 6명)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더구나 해당 통계가 전체 온열질환의 일부만을 감시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피해는 몇 배가 될지 알 수 없다.

올해도 어김없이 건설노동자들, 물류센터 노동자들, 라이더 노동자들이 폭염대책을 마련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행법이 온열질환 예방조치를 강제하지 못하고, ‘고온·고열작업’을 용광로 등 특정 작업으로만 한정하고 있다는 지적도 매년 반복되고 있다. 그래서 폭염대책과 관련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도 매년 발의되고, 매년 사장된다.

그런데 올해는 또 다른 기가 막힌 광경이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 세계 4만3천명의 청소년들이 그늘 한 줌 없는 간척지에서 야영하는 모습을 전 국민이 일주일간 노심초사하며 지켜봤다. 위험천만한 강행군은 천억원대 예산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고 이를 멈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폭주를 멈춘 것은 또 다른 기후재난인 태풍이었다.

연일 온열질환자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중환자가 발생하지 않았으니 대회를 중단하지 않겠다”던 조직위원회와 “잼버리는 피서가 아니다”라던 도의원까지. 지켜보고 있자면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나의 눈길을 끈 뉴스는 소방당국이 조직위에 개영식 행사 중단을 요청했음에도 묵살당한 채 30분 가까이 행사가 지속됐다는 대목이다. 소방당국이 ‘대응 2단계’를 발령한 시점에서조차 행사중단은 왜 ‘명령’이 아니라 ‘요청’밖에 되지 못하는 것일까? 조직위 사무총장은 “당시 행사 중단이 참가자들의 안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는데, 안전 문제에 대한 판단 주체가 왜 소방당국이 아닌 주최측이었을까?

이런 상황은 노동현장에서 매일 반복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폭염시기 ‘물, 그늘, 휴식’을 강조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권고사항일 뿐이다. 모든 사업주가 ‘안전제일’을 외치지만 달성해야 하는 생산량, 맞춰야 할 공사기간 앞에서 휴게시간 확대는 가이드라인 홍보물 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노동자들은 노동자들대로 휴식과 작업중지가 임금삭감으로 직결되니 ‘굶어 죽느니 더워 죽는 것’을 선택한다. 자본주의 논리로 달려가는 폭주기관차를 멈춰 세울 권력이 ‘안전’에는 없다. 사람이 죽고 쓰러지는 파국이 벌어져야 겨우, 그것도 잠시 멈출 뿐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시스템이다. 위험이 목전에 차오를 때까지는 누구도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다가 사람이 죽어야 노동부·경찰·검찰 같은 권력이 작동하는 시스템이라니. 돌이켜보면 매번 그래 왔다. 청주 궁평지하차도에서도 사람이 죽고 나서야 검찰의 권력이 컨트롤타워를, 책임자를 찾기 시작했다. 사고 직전까지 어디에도 없던 컨트롤타워를. 매번 참사의 원인과 책임을 따지지만 좀처럼 시원스러운 결론을 내지도, 실제 작동하는 예방대책을 마련하지도 못한다. 매년 반복되는 폭염대책처럼 말이다. 이 지지부진함을 어찌해야 할까? 시작은 아마도 안전이 권력의 문제라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책임’의 제자리를 찾는 것이 안전의 뿌리라면 ‘권력’의 제자리를 찾는 것이 안전의 줄기다. 폭염에 지친 노동자들이 스스로 일을 멈추고 당당히 휴식을 요구할 수 있을 때 사고는 예방된다. 대통령이 행사장 맨 앞줄에서 박수를 치고 있어도 소방관이 행사를 멈출 수 있을 때 사고는 예방된다. 예방을 위한 법과 제도는 책임자들의 의무와 더불어 당사자들의 권리와 권한, 그들의 권력을 중심으로 다듬어질 때에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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