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노동자들의 노필터 일 이야기 /저자 비정규 노동자 44인/츌판 동녁
투명한 노동자들의 노필터 일 이야기 /저자 비정규 노동자 44인/츌판 동녁

 

편집자는 남의 글을 평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책이라는 정돈된 결과물(상품)을 내놓아야 하는 일의 특성상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편집자의 이 ‘평가’는 책이 나오기 전까지 원고의 ‘첫 번째 독자’이자 ‘유일한 독자’라는 설렘과 부담감 속에서 이루어진다. ‘유’에서 또 다른 ‘유’를 만드는 일이 ‘무’에서 ‘유’를 만드는 일에 비할 수 있을까? 나는 글, 더 정확히는 그 글을 만들어낸 저자의 경험과 생각에 비하면 편집은 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 글은 ‘평가’ 이전에 ‘감탄’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한 편집자의 바람으로 봐주시면 좋겠다.

가장 먼저 꼽고 싶은 것은 ‘새로움’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울 필요는 없다. 익숙함과 새로움의 ‘조화’는 어디서든 ‘베스트셀러’의 공식이 아닌가. 이미 나왔던 소재라면 그 소재를 다루는 저자의 이력이나 경험이 새롭거나, 아니면 거기서 이끌어내는 메시지가 새롭길 바란다. 그런 점에서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이야기’는 무척 매혹적이다. 지금처럼 보고 듣고 읽을 게 넘치는 시대에 그런 이야기가 남아 있냐고? 있다. 바로 일 이야기다. <일복 같은 소리> 원고를 처음 읽고 나는 그런 이야기를 만났구나 싶었다.

차로 한가운데에 라바콘 세 개를 세워두고 맨홀 점검을 하던 노동자는 엄청난 속도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차에 “넋이 나가버렸다. 놀라서도, 두려워서도 아니라 무언가 짓밟혔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기용제로 가득 차 헛구역질이 절로 나는 탱크 안에서 일하던 조선소 노동자는 마스크를 벗고 일하는 다른 도장공을 바라보며 “살려고 일하는지 죽으려고 일하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들의 문장을 읽을 때 나는 자동차와 매연이 가득한 도로 위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조선소의 탱크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곳’에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그러나 이야기가 없다. 이보다 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새로운’ 이야기가 있을까?

다음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솔직함’이다. ‘새로움’이 독자의 눈길을 잡아챈다면, ‘솔직함’은 독자를 무장 해제시켜 글에 계속 붙잡아둔다. 셋이 일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급여를 쪼개 받으라는 요구에 “이 거지 같은 노동법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노동법일까”라고 푸념하던 식당 노동자는, 반찬 투정을 하는 손님에게 “주는 대로 먹어”라는 말을 내뱉고 싶었다고 한다. 쿠팡 배달 노동자와 새벽 엘리베이터 점유 ‘경쟁’을 벌이던 우유 배달 노동자는 어느 날 새벽 문득 ‘부끄러움’을 느낀다. 수건을 덧대도 소용없을 만큼 피부가 헐어 고생하는 급식실 노동자가 방학을 반기지 못하는 것은 일당제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렇듯 당사자가 꺼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을 적나라한 이야기들이 <일복 같은 소리>에는 가득하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저자들 모두 ‘덤덤한 말투에 그렇지 못한 내용’이라는 ‘반전’의 글쓰기를 체화하고 있다. 오랜 시간 자기 생각과 감정을 정직하게 마주한 사람만이 가능한 이 ‘스킬’에 나는 속절없이 매료되었다.

글을 쓰면 뭔가가 바뀔 거라고 무책임하게 말하고 싶지 않다. ‘잘 쓴 글’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말까인데 ‘평범한 글’은 턱도 없을 것이다. 더 많은 일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고 해놓고 왜 갑자기 야박한 소리인가 싶다면, 나는 당신의 이야기가 평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평범하고 별것도 아닌 것 같아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마음에 남아 있는 그 기억을 꺼내달라고 말하고 싶다. 당신은 평범하지만 당신의 이야기는 아직 평범한 이야기가 되지 못했다. 그러니 더 많이 이야기되어 제발 평범해졌으면 좋겠다. 너무 평범해져서 뭔가가 바뀌지 않을 도리가 없을 만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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