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부산 부산진구엔 서울 여의도공원의 5배나 되는 부산시민공원이 있다. 시민공원은 번화가인 서면 바로 옆이라 부산시 한가운데다.

이 땅은 슬픈 한국사를 담고 있다. 일제가 1930년에 여기에 서면경마장을 조성했다가 1937년 중일전쟁 때 부산항 배후 군사기지로 바꿨다. 일제 패망 뒤 미군이 캠프 하야리아 기지로 반세기 넘게 차지했다가 2006년 철수했다.

미군기지 철수 얘기가 흘러나오던 90년대 중후반부터 부산시 권력자들은 이곳에 아파트를 짓고 싶어 안달했다. 그러나 미군기지 철수와 공여지 반환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당시 미군기지 앞에서 10년 넘게 집회를 벌인 탓에 토건세력을 물리치고 지금처럼 온전한 공원이 됐다. 공원 안엔 이 땅의 역사를 담은 안내판이 바닥에 설치돼 있다. 바닥 표지석엔 100년의 부산 역사를 담았지만 이 땅을 순수한 공원으로 만드는데 기여한 시민들의 업적은 없다. 오히려 토건세력에게 공원을 내어주고 싶어 안달했던 이들의 얼굴만 사진으로 남아 있다.

깨어있는 시민사회의 집회가 400만 부산시민에게 온전히 향유할 넓고 큰 공원을 허락했다. 집회를 몹쓸 벌레 취급하는 윤석열 정부가 이런 걸 알 리 없다.

부산시는 지난해 연말 부산시민공원 남1문 입구에 기후위기 시계를 세웠다. 이 시계는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기반으로 지구의 평균 온도가 산업혁명 이전보다 1.5도 상승하기까지 남은 시간을 표시한다. 엊그제 가보니 시계는 6년 남짓 남은 시간을 가리켰다. 부산시가 이렇게라도 상징의식을 행하는 걸 보니 기후위기가 무섭긴 하나 보다.

최근 유엔 세계기상기구(WMO)는 지난 반세기 동안 기후위기가 불러온 기상 이변으로 전 세계에서 약 200만명이 죽고 4조억 달러가 넘는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경향신문 5월 23일 11면, <“약자에 더 가혹한 기후재난 반세기 동안 200만명 사망”>)

세계기상기구는 1970~2021년 사이 기상 이변으로 발생한 사망자 10명 가운데 9명이 개발도상국 국민이었다고 밝혔다. 같은 기간 아시아에서만 98만명이 죽고 1조4천억 달러의 피해를 입었다. 같은 기간 아프리카에서도 73만명이 숨졌다.

오랜 기간 피해를 입는 개도국 처지에서 벗어난 한국은 이제 피해를 끼치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개발 만능주의에 젖은 정치인 머리를 바꾸지 않으면 한국은 ‘기후 악당’이란 불명예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부산시와 같은 색깔의 정당이 집권한 서울시는 ‘한강 르네상스 2.0’ 사업을 전담할 별도 기구를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개발이란 이름으로 공유지를 난도질할 권한을 토건세력에게 넘겨주겠다는 발상인데, 서울시는 ‘영국 템스강이나 파리 센강 못지않은 세계적 관광 명소로 만들겠다’고 한다. (매일경제 5월 22일 1면, <오세훈 “한강개발 전담기구 만들 것”>)

정치인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게 관광 명소를 만드는 지름길이다. 외국 관광객이 한국을 찾는 이유는 유명한 건축물이 있어서가 아니다. 관광객들은 스타벅스에 휴대폰과 노트북을 아무렇게나 놓아두어도 훔쳐 가지 않는 시민들의 두터운 신뢰 자산 탓에 한국을 찾는다. 외국 관광객은 지하철에 지갑을 놓고 내려도 몇 시간 안에 인근 지구대에서 돌려받는데 놀라 한국을 찾는다. 지갑을 주운 시민과 경찰의 발 빠른 대응 때문에 관광객이 열광하지, 한강에 요란한 건물 짓는다고 관광객이 오진 않는다.

내가 아는 한 후배는 몇 년 전 가족과 함께 북유럽 강소국 스웨덴을 여행하다가 지갑을 도둑맞아 끝내 찾지 못했다. 그 후배는 도둑맞은 장소가 호텔 조식 식당이라서 더욱 충격이 컸다. 그런 선진국에도 없는 신뢰 자산이 한국엔 수없이 많다. 이런 자산은 관료나 정치인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준 게 아니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