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진일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대표

고 양회동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3지대장이 몸을 불사른지 보름이 지나고 있다. 그 누구 하나 이 죽음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고 있다. 오히려 검찰과 경찰은 건설노동자들에 대한 수사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범위를 넓혀 가고 있다. 지난 12일에는 경찰이 건설노조 대전충남세종전기지부를 압수수색했다. 영장사유는 ‘비록 피의자들이 단체협약 시 피해자들에게 협박 또는 해악 등을 가한 사실이 없지만, 단체협약을 체결하지 않거나 전임비를 지급하지 않을 시 위와 같이 행동을 통해 이후 회사운영에 막대한 지장이 생길 수 있는 정황이 충분히 예상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언제부터 우리가 마이너리티리포트 같은 SF적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었단 말인가?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만 추산해도 전국에서 1천여명이 조사를 받았고 이미 16명이 구속됐다. 양회동 열사의 죽음은 결코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건설노조 탄압은 대통령의 공개적이고 구체적인 지시에 따라 사법기관이 일사분란하게 저지르고 있는 국가의 조직적 폭력이다. 한 건설노동자의 죽음으로 드러났을 뿐, 그 이면에는 수천의 노동자와 그 가족, 동료들의 고통이 켜켜이 쌓이고 있다. 얼마나 더 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낼지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이런 방식으로 자행되는 국가폭력은 언제나 피해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과 더불어 ‘사회적 낙인’이라는 정서적 폭력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43년 전 오늘 광주의 시민들에게 ‘빨갱이’ ‘간첩’이라는 낙인을 찍은 것처럼 말이다. 피해자들은 국가의 압도적인 사법적·물리적 폭력에 더해 그들의 존엄을 부정하는 사회적 낙인으로 고통받고 고립된다. 그래서 국가폭력의 상처는 더욱 깊고 오래도록 아물지 않기 마련이다. 윤석열 정부는 이번엔 건설노동자들에게 ‘건폭’이라는 낙인을 준비했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활동하는 노동조합의 활동가가 아니라 금전적 이익을 위해 공갈·협박을 일삼는 폭력배라는 낙인을 말이다. 양회동 열사의 유서는 이 폭력의 메커니즘을 여실히 보여준다. “집시법 위반도 아니고 업무방해 및 공갈이라니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그의 마지막 말은 지금의 국가폭력의 칼끝이 건설노동자들의 어디를 찔렀는지 정확히 드러낸다.

돌이켜보면 건설노조 활동에 대한 사법기관의 표적수사는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지금처럼 집중적이고 대대적이지는 않았지만 지난 2003년 즈음에도 건설노조 간부들에 대한 수사, 무더기 기소가 연이어 이루어졌다. 당시의 상황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검경은 건설현장에서 안전수칙 준수를 요구하고 단체협약 체결을 위해 활동했던 노동조합 간부들을 공갈 등의 혐의로 기소하고 처벌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당시 세 차례에 걸친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상황에 대해 “단체교섭 등을 통해 건설 노동자를 보호하는 노동조합의 활동이 범죄로 인식되고 광범위한 수사와 경찰 개입이 이뤄지는 것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또한 “노조활동과 관련해 노조 지도자 또는 조합원을 구금하는 것은 시민의 자유, 노동조합 권리에 심각한 간섭이다. 노조활동의 정상적인 발전에 해가 되는 협박과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 특히 불안정하고 취약한 노동자의 경우 위협의 효과가 더 강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법절차라는 가면을 쓴 국가폭력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는 원인이자 결과는 건설노동자들의 불안정하고 취약한 노동 3권 그 자체이다. 보통의 노동조합이라면 단체협상 과정에서 통과의례로 벌어지는 집회와 시위가 왜 건설노동자들에게는 협박이 되는가? 보통의 노동조합에게는 일상활동인 현장 안전점검과 개선요구를 건설노동자들이 하면 왜 공갈이 되는가?

다단계 불법하도급이 만연한 건설현장에서 실질적인 사용자와의 교섭권을 보장하지 않고, 안전 문제를 비롯한 현장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쟁의권을 인정하지 않는 지금의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이 건설노동자들의 정당한 노조활동을 불법행위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비단 건설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ILO가 지적하듯 모든 불안정하고 취약한 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에 대한 문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치인 노조법 2·3조 개정안이 드디어 법사위에 계류됐지만 3개월이 다 되도록 본회의에 상정되지 않고 있다. 이번 개정안은 비록 충분치 않지만 특수고용·간접고용 노동자를 비롯한 불안정하고 취약한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교섭권과 쟁의권을 보장하는 최소한의 조치들을 담고 있다. ‘노동조합 공격’이라는 국정기조가 결국 국가폭력의 형태로 드러나는 파국 앞에서 정치의 역할은 무엇인지 국회가 다시 생각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부의 폭주를 멈추고 이 사회의 노동 3권이 제자리를 찾도록 노조법 2·3조 개정안이 조속히 통과돼야 한다.

다양한 국가폭력의 사례에서 피해자들의 치유와 회복은 국가의 낙인으로 난도질 당한 그들의 정체성을 사회가 온전히 인정해 줄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고들 이야기한다. 광주의 영령들에 대한 위로가 민주화운동이라는 공식명칭을 얻으면서 시작된 것처럼 말이다. 양회동 열사에게 ‘당신은 공갈범이 아니라 노동조합 활동가입니다’라고 위로의 말이라도 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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