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상급종합병원 간호사 이은영씨는 27년 전 입사 당시 58병상 규모의 소화기내과병동에 배치됐다. 하루에 담당하는 환자는 보통 17~18명이었고 많을 때는 20명까지 본 적도 있다. 현재 이씨가 일하는 병원은 간호사 1명당 환자 12명이 배정된다. 담당 환자수는 줄었지만 이씨의 노동강도는 큰 변화가 없다고 한다. 환자의 요구가 과거에 비해 많아진 데다 각종 문서작업 같은 부가업무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국제간호사의 날을 하루 앞둔 11일 열린 간호사 근무환경 개선을 위한 토론회에서 이씨는 “환자 20명을 볼 때나 12명을 볼 때나 간호사들은 계속 바쁘다”며 “업무가 많다보니 매일 한계에 부딪치는 생활을 지금도 반복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간호인력 노동환경 개선과 보건의료서비스 질 향상을 위해서라도 간호사 1명당 환자수를 줄이고 제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날 토론회는 국회 의원회관 2세미나실에서 보건의료노조와 의료노련·대한간호협회 공동주관으로 열렸다.

간호사 22.1% 일주일에 4회 이상 “밥도 못 먹어”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정책연구원장은 노조가 매년 실시하는 정기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올해 조합원 4만8천4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를 보면 간호직 응답자 가운데 74.1%가 “이직을 고려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가끔씩 생각한 적이 있다”가 50%, “구체적으로 생각한 적이 있다”가 24.1%였다. 이직을 고려한 이유로는 ‘열악한 근무조건·노동강도’가 43.2%로 가장 많았고, ‘낮은 임금’이 29.4%로 뒤를 이었다.

응답자 대부분 직장생활에 대한 만족도는 낮았다. 직장생활 만족도 평가에서 ‘인력수준’의 경우 다른 항목에 비해 부정 비율이 77.2%로 가장 높았고, ‘임금수준’(66.8%)과 ‘업무량·노동강도’(64.3%)가 뒤를 이었다. 상당수는 직무 소진(번아웃)에 시달리고 있었다. 육체적(78.1%)·정신적(71.3%)으로 지쳐 있다는 응답이 상당했다.

업무에 허덕이다 식사를 거르는 경우도 빈번했다. 최근 5년간 주평균 식사를 거르는 횟수를 분석한 결과 5명 중 1명(22.1%)이 ‘4회 이상’끼니를 챙기지 못했다. “거르지 않는다”는 응답은 35.1%에 그쳤다. 토론회에 참석한 한 대학병원 간호사 아버지라고 밝힌 A씨는 “단백질 음료나 계란을 가방에 넣어주는데 그것도 못 먹고 오는 날이 많다”며 “데이근무(오전 6시~오후 2시)일 때도 새벽 4시쯤 나간 아이가 집에 돌아올 때는 저녁 8시쯤인데 그제야 첫끼를 먹는다”고 전했다.

복지부, 법제화는 ‘글쎄’ 처벌 강화는 ‘필요’

보건의료노조와 의료노련 모두 간호사 1명당 환자수를 5명으로 줄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노조에 따르면 간호사가 하루에 담당하는 입원환자수는 선진국이 약 5명 수준인데 한국 상급종합병원의 경우 약 16.3명, 중소병원의 경우 약 43.6명에 이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건 통계 2022’를 보더라도 한국 간호사는 인구 1천명당 4.4명으로 OECD 평균(8명)에 비해 3.6명이 차이가 난다. 독일의 경우 12.1명, 일본은 9.9명이다.

정부도 간호인력 확충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달 25일 발표한 ‘2차 간호인력 지원 종합대책(안)’에서 상급종합병원에서 간호사 1명이 환자 5명을 간호할 수 있도록 정책적 지향점을 설정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추진계획과 로드맵은 빠졌지만 ‘근무조별 간호사 대 환자비율 1:5’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은 의미있는 진전으로 평가된다.

토론회에 참석한 임강섭 보건복지부 간호정책과장은 “기존 병원에 대한 구조조정 없이 간호사 대 환자비율을 맞추기는 어렵다”며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과 낮은 인력기준을 둔 의료기관에 재정을 투입할 수는 없기 때문에 병상 통제와 기존 병원에 대한 구조조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임 과장은 간호사 1명당 환자수 법제화에는 난색을 표했다. 임 과장은 “시대변화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법률에 수를 명시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의료기관이 고의로 심각하게 인력기준을 지키지 않았을 때 패널티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므로 이를 높이는 것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간호인력인권법 제정하라”

한편 이날 오전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간호사 1명당 환자수 법제화를 촉구했다. 논란 끝에 국회를 통과한 간호법도 정부가 발표한 간호인력대책도 미흡하기 때문에 간호사 1명당 환자수를 법제화한 간호인력인권법이 제정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간호인력 인권 향상을 위한 법률(간호인력인권법)은 국민동의청원을 통해 10만명 동의를 받아 2021년 10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회부됐다. 간호사 1명당 환자수를 법제화하고 이를 위반했을 때 처벌하는 게 핵심 내용이다. 그런데 입법 청원 취지가 이미 간호법 제정안에 반영돼 있어 본회의에 부의하지 않기로 보건복지위원회에서 결론을 내리면서 청원심사소위로 옮겨진 상태다.

의료연대본부는 30일 보건의료인력 충원과 의료민영화 저지 등을 촉구하며 대통령실 앞에서 집회를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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