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진일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대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몇 개월 사이 만성폐쇄성폐질환과 두 건의 직업성암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게 됐다. 재해자들의 예후도 각각 다르고 예상되는 업무연관성 입증 난이도도 다르지만, 이 정도의 질환들을 진단받은 이들의 절박함과 두려움이야 매 한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이 세 명의 재해자들이 똑같이 겪어야 할 고통이 하나 더 있으니, 다름 아닌 역학조사다.

운영규정상 처리기한이 180일임에도 보통 2~3년, 길게는 5~6년이 걸리는 역학조사의 악명은 이미 드높다. 그리고 앞선 3명의 재해자와 같이 대다수의 폐질환, 직업성암 재해자들이 산재를 인정받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근로복지공단은 기준도 명확하지 않은 채로 너무 많은 사건을 역학조사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미 충분한 사례가 축적돼 역학조사가 불필요한 사건, 혹은 현실적으로 역학조사가 불가능한 사건에 대해서도 현실적 고려 없이 ‘과학적 검증’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이런 중증환자들이 산재인정 이전에 역학조사가 끝날 때까지 살아남는 것부터 걱정해야 하는 상황은 너무나 잔인하지 않은가?

한편, 이 재해자들을 만나면서 역학조사와 관련된 또 다른 과거의 사건이 떠올랐다. 재해자는 발전소에서 청소일을 하는 하청노동자였고 그녀가 속한 노동조합의 지회장과 함께 만났다. 그녀는 어느 날 오전 석탄야적장 주변의 건물을 청소하다가 두통과 매스꺼움을 느껴 조퇴했다. 집에서 상태가 더 악화해 119로 병원에 후송돼 일산화탄소중독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증상은 며칠 만에 사라졌고 그녀는 복귀할 수 있었다. 상담 후 산재신청을 했고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승인받기까지 1년이 걸렸다. 역학조사가 진행됐던 것이다. 사고 당일 석탄야적장에서 자연발화가 있었다는 기록은 초기에 확보돼 있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의 승인 여부를 가리는 데에 전문가들이 1년이나 매달려야 하는 것일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속터지는 마음은 잠시 덮어두고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이 청소노동자는 왜 산재신청을 했을까? 휴업 기간도 며칠에 지나지 않고 병원비도 하루 응급실 치료와 통원치료 몇 번으로 많지 않은 비용이었다. 대단한 보상을 받자고 산재신청을 한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석탄이 대량으로 쌓여 있는 발전소에서 자연발화가 발생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며, 재해자를 비롯해 많은 청소노동자들이 몇 번씩이나 비슷한 증상을 겪었다. 반복되는 위험한 상황에 대해 대책을 요구하고 싶었고, 그냥 얘기해서는 들어주지 않는 회사와 싸울 근거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1년이나 걸릴거 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우리는 그 자리에서 산재상담보다는 어떻게 개선할지, 회사에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 더 많이 이야기했다. 주요 위험지역에 경보기와 방독마스크 비치하기, 청소노동자들에게 가스감지기 지급하기, 2인1조로 작업하기 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산재신청 교육을 할 때면 언제나 공상처리가 아니라 제대로 산재신청을 하라고 말한다. 개인적인 손해의 문제를 떠나 산재신청을 해야 재해조사도 이뤄지고 재발방지도 되는 거라고 말이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는 적어도 역학조사가 개입되는 사건에 한해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론에 불과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역학조사가 동종재해 예방이나 재발방지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이유는 역학조사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유와 맞닿아있다. 산재보상 과정에서 지나치게 과학적 정합성만이 강조되고, 재해조사 과정이 그것에만 편중돼 있기 때문이다. 재해의 원인을 밝히는 조사와 예방조치를 강구하는 것은 분명 연결돼 있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시각과 접근이 필요한 과정이다. 조사가 개별적인 사건에서 출발한다면 예방은 가능성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개별적인 사건의 업무연관성이 입증되지 않는다고 해서 위험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예방조치가 불필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산재인정 여부에 재해자의 운명과 현장의 예방조치 등 모든 것이 달려있다. 하긴, 산재로 인정을 받아도 현장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 판에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돌이켜보면 일산화탄소중독 사건으로 마주 앉았던 우리도 ‘산재로 인정을 받아야 개선을 요구할 명분이 생긴다’는 몹쓸 관념에 스스로를 가둬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여기에는 그런 명분이 없이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는 너무도 흔한) 사업주의 태도가 전제돼 있겠지만 말이다. 여기에 산재로 승인받은 사안에 대해서만 형식적으로라도 재발방지대책을 제출하도록 하는 행정구조가 함께 작용한 결과가 지금의 현실을 만든 것이다.

역학조사가 지연되는 동안 죽어 가는 것은 산재보상을 신청한 재해자만이 아니다. 그와 같은 환경과 조건에서 일하는 또 다른 노동자가 어디선가 죽어 가고 있다. 역학조사 문제는 단순히 인력을 늘리거나 절차를 손보는 정도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산재보상의 대원칙 중 하나인 ‘상당인과관계’에서 궤도이탈해 ‘과학적입증’의 세계로 가 버린 역학조사를 다시 데려와야 한다. 그래야 ‘정합성’에 가려졌던 ‘가능성’의 영역이 열릴 것이고 거기에서 예방 기능이 작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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