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그럴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했다고 한다. 강석훈 한국산업은행 회장과 경영진이 노동자를 피해 산업은행 밖에서 경영협의회를 열고 부산 이전 정부제출안을 의결하진 않을 것이란 실낱같은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무너졌다. 강 회장과 부행장들은 지난달 27일 산업은행 부산 이전에 반대하는 노동자를 피해 서울 마포구 모처의 호텔에서 정부에 건넬 부산 이전 관련 당행(산업은행) 의견제출안을 의결했다. 강 회장은 몰라도 믿었던 선배들(부행장)마저 단 한 명도 반대하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김현준(42·사진) 금융노조 한국산업은행지부 위원장의 표정은 착잡했다. <매일노동뉴스>는 3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산업은행 본점에서 김 위원장을 만나 부산 이전 반대 이유를 들어봤다. 이날은 지부가 부산 이전 반대 아침집회를 시작한지 300일째 된 날이었다.

“부산 이전안 의결
대화 요구 묵살에 회장 권한 남용”

-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 의견안 정부제출에 대해 위법성을 주장하고 있는데.
“회장의 권한 남용으로 본다. 한국산업은행법은 산업은행의 업무에 관한 중요 사항을 이사회에서 의결하도록 정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열린) 경영협의회는 이사회가 회장에게 위임한 사항을 처리하기 위한 조직에 불과하다. 법률에서 정한 산업은행의 본점을 이전하는 내용을 경영협의회에서 의결하는 것은 경영협의회에 부과된 권한을 넘어선 것으로 권한 남용이다. 최근 3년간 경영협의회가 다룬 안건은 코로나19 확산에 대응한 회사채 차환발행 등이다. 해야 할 업무를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소집하는 것이지 부산 이전을 멋대로 추진하라고 소집할 게 아니다. 경영협의회 의결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지난달 28일 제기했다.”

- 경영협의회를 외부에서 개최한 것도 이례적이다.
“졸렬했다. 당초 강 회장 등 경영진은 본점 내에서 경영협의회를 하려 했다. 그래서 지부가 미리 회장실 인근에 대기하면서 회의를 막고자 했고 조합원들이 본점 입구 곳곳에서 경영진 출근을 막아 세울 계획이었다. 그러면서도 본점 밖에서 경영협의회를 열 가능성도 있다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 실망스럽다. 지부는 지금 부산 이전에 반대하고 있지만, 그래도 직접적으로는 소통을 요구하고 있다. 부산 이전이 타당한지 함께 따져 보자는 거다. 태스크포스를 노사공동으로 만들어 점검해 보자고 요구했다. 묵살됐다. 강 회장이야 정권이 꽂은 외부인사라고 해도, 다른 부행장들은 존경받던 선배들 아닌가. 그들 가운데 단 한명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 산업은행은 동남권 조직 확대를 명분으로 이미 일부 직원을 부산으로 내려보냈다.
“실상은 우스운 수준이다. 지난해부터 추진한 직제규정 변경으로 현재 정원 54명을 내려보냈다. 숫자는 54명인데 실제로는 54명의 반절이 조금 넘는다. 현장에 사무실도 없어서 회의실에 모여 일을 보고 있는 수준이다. 인사발령이 1월19일인데 지금까지도 서울에서 일하는 직원이 있다. 부산에서 출근한 것으로 돼 있는데 실제로는 서울 사무실에서 원격으로 업무를 하고 있다. 이게 무슨 촌극인가. 정권이 보내라 보내라 하니까 보여주기식으로 일부 노동자만 준비도 없이 내려보내고 그나마도 보낼 수 없어 원격근무를 하고 있다. 그들은 무슨 죄인가. 산업은행을 부산으로 이전하자는 정부 차원의 결정이 졸속이고, 이에 따르는 경영진의 보여주기식 졸속 이전의 단면이다. 이렇게 조직을 쪼개고 위법한 경영협의회 의결로 행정절차를 마무리해도 법이 바뀌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아닌가.”

목적·절차 부당한 이전 논의, 책임 분산 궁리만

- 부산 이전이 부당한 이유는 뭔가.
“목적과 절차가 모두 틀렸다. 산업은행을 부산으로 이전하면 국토균형발전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다. 부산에 좋은 일자리 1천~2천개는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부산 외에 강원·전라·충청은 어떤가. 산업은행은 지역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기관이 아니다. 일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지역 전반에 돈을 돌게 하는 기관이다. 산업은행은 여의도에 집적된 금융기관에 채권을 팔아 자금을 조달하고 이를 낙후한 기업, 투자가 필요한 기업, 구조조정이 필요한 기업에 쓴다. 일종의 교차보전이다. 산업금융채권(산금채)을 괜찮은 금리에 금융기관에 팔려면 네트워킹이 필수다. 부산으로 옮기면 네트워킹이 약화돼 조달금리가 높아지고, 그러면 결국 기업투자가 위축한다. 이게 국토균형발전인가. 해외투자도 생각해 보라. 해외투자자들이 한국에 두어 달 장기 체류하지 않는다. 부산까지 KTX 타고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기관이 내려가면 자연히 네트워크가 단절한다. 이를 우려하기 때문에 부산 이전은 국토균형발전이라는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 절차 얘기를 안 할 수 없을 것 같다.
“최근 산업은행이 10억원을 들여 컨설팅을 시작했다. 국정과제인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시 정책금융역량 강화방안이라고 한다. 당초에는 정책금융 축소 방지방안이었다고 한다. 이를 강 회장이 강화방안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결국 정책금융 기능 축소는 자명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이전 타당성부터 따지는 게 순서다. 절차적으로 부산 이전이 정책금융 기능 약화를 부르진 않는지 따지고 그 이후에 이전을 할지 말지 정하는 게 순서다. 그런데 일단 간다고 찍어 놓고 컨설팅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서로 책임지기 싫어서 정부와 산업은행 등이 핑퐁게임을 하고 있다. 이번에 경영진이 제출한 부산 이전안은 국토균형발전위원회가 공문으로 요구하면서 진행된 것이다. 부산 이전을 하려면 지방이전 대상기관으로 선정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관계부처가 이를 정해야 한다. 말하자면 금융위원회가 산업은행을 찍어서 이전 대상기관으로 국토균형발전위에 보고하면 된다. 그런데 그걸 안 하고 산업은행에 의견안을 내라고 했다. 자처한 것처럼 연출한 셈이다. 나중에 문제가 될 게 빤하니 책임을 분산하려는 시도다. 이런 식의 절차가 정당한가.”

- 다른 목적이 있다고 보나.
“결국 정치적 욕망이다. 산업은행 노동자를 개인이기주의, 지역이기주의로 매도하지만 실상은 부산 지역의 총선 승리를 위한 정치적 목적 아닌가. 그런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한국 경제의 위기 상황에서 산업은행의 정책금융역량 저하가 불보듯 뻔하고 국토균형발전에도 기여하지 못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2005년 국토균형발전을 위한 공공기관 지방이전을 처음 시작한 뒤 2009년 산업은행을 비롯한 금융공공기관 이전을 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 있었다. 이후 현재에 이르러 당시와 상황이 변했는지 검토조차 하지 않았다.”

지난해부터 130여명 퇴사, 역량 위축 가시화

- 본점 로비 아침집회가 오늘로 300일째다. 조합원이 지치진 않았는지.
“지치지 않았다. 조합원이 나서서 지지하고 응원할 뿐 아니라 먼저 행동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경영진의 졸속 의결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모두 알고 있다. 조합원이 2천300여명가량인데 연명을 받을 때 2천800명 정도가 응한다. 노조를 넘어 직원 전체가 한 뜻으로 연대하고 있다. 매일 아침 조합원 300~400명이 운집하는 것만 봐도 조합원들의 열의를 알 수 있다.”

- 한편으론 우려했던 직원 이탈이 가시화하고 있다.
“그렇다. 통상 산업은행의 의원면직이 30여명 정도였다. 지난해 98명이 퇴사했고, 올해도 30여명이 더 나갔다.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이전 대상기관으로 지정되면 더 가속화할 수 있다. 산업은행은 경력직을 뽑지 않는다. 빈자리를 모두 신입사원으로 채워야 한다. 신입채용 목표는 연간 160명인데, 다 채워질지도 의문이다. 이들이 들어와도 퇴사한 경력자의 역할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잘못된 정책 때문에 산업은행의 역량이 위축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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