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노사관계 연구의 권위자인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쓴 ‘사회적 직무급 개념의 이론화 시도와 한국적 효용성 모색: 독일 서비스 직종의 다양한 사례분석’을 읽었다. 어제 부산대에서 열린 고용노사관계학회 2023년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글이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독일에서는 직무급을 2차 노동시장, 즉 하층 노동시장을 보호하려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직무급 논의를 1차 노동시장, 즉 상층 노동시장을 약탈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한국적 상황과 대비된다. 나는 1차 노동시장과 2차 노동시장이라는 표현보다는 상층 노동시장과 하층 노동시장이 더 정확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박 선임연구위원은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 확대와 양극화 심화 원인으로 노동조합들을 즉자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의 주류적 관행은 국가와 자본이 주도해 만든 (역사적) 틀 내에서 형성됐기” 때문이다.

국가와 자본이 강제한 기업별노조와 기업별 교섭의 역사적 결과물이 한국적 연공급-호봉제 임금체계다. 이는 “경제발전 과정에서 국가와 자본이 주도해서 이식한 제도”이지 “노동운동 스스로 관철시킨 것은 아니다”고 박 선임연구위원은 설명한다.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독특한 역사적 경로가 있었고,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모든 것은 그 역사적 경로가 만들어 낸 특수한 산물인 것이다.

연공급-호봉제가 어떻게 해 대한민국의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에 뿌리내리게 됐는지 역사적 고찰이 선행돼야 한다. 하지만 이는 윤석열 정권의 고용노동부에 동원돼 곡학아세의 길을 가는 어용 교수들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들의 진단이 글렀는데 처방이 바로 될 리 만무하다.

박 선임연구위원이 지적하듯이 윤석열 정권의 정책은 “1차 노동시장 임금인상 제어에만 천착”할 뿐, “2차 노동시장 임금인상 유인은 부족”하다. “민간부문에 강제할 정치적 수단도 미흡”해, 그 지속성도 의심스럽다. 특히 “직무중심성과 성과중심성은 상반되는 가치인데, 이 둘을 결합시키는 것은 어불성설”로 “개념적 오류”다. 결과적으로 “양극화된 교섭관행을 유지한 채, 1차 노동시장의 임금체계만 핀셋요법처럼 빼내 갈아 끼우는 방식의 개혁은 불가능하고 한계가 있다”는 것이 박 선임연구위원의 결론이다.

사실 윤석열 정권이 때리고 싶은 대상은 대기업·정규직 노조 일반이 아니다. 국가와 자본이 때리는 대상에 사업장 밖 노동시장 하층의 사정에는 관심 없이 관변학자들이 만들어 준 개념인 ‘노조의 사회적 책임’(USR) 운운하며 자기 이익에만 집착하는 ‘경제적 조합주의’(bread and butter unionism) 성향의 대기업·정규직 노조는 빠져 있기 때문이다. 공사 시험 붙은 걸 왕조시대 과거시험 합격으로 착각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가로막던 이른바 ‘MZ세대’ 노조들도 빠져 있다. 조정자와 중재자라는 국가의 중립적 역할을 버리고 자본과 한 몸이 된 윤석열 정권이 때리고 싶은 대상은 한국 노동운동의 주력 부대인 양대 노총 산하의 반정부 성향 노동조합들이다.

어용 지식인들과 ‘기레기’들은 노동시장 상층의 대기업·정규직 노조가 노동시장 하층의 취약 노동자를 “착취”한다고 선동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노동시장 하층 노동자들은 노동시장 하층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한다. 그리고 노동시장 하층 자본가들은 노동시장 상층 독점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한다.

노동시장의 상층-중층-하층의 공급사슬(supply chains)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독점자본가들은 노동시장 중하층을 “착취”한 초과이윤 중 일부를 대기업·정규직과 공공부문 노동자들에게 흘려 줌으로써 카를 카우츠키가 대중화하고 레닌이 이론화한 개념인 ‘노동귀족’(labour aristocracy)을 만들어 내고 있다. 노동시장을 1차와 2차, 혹은 상하로 분단하고 노동자를 분열시키면서 지배와 통제로 굴러가는 공급사슬을 유지하는 최정점에 이재용·정의선·최태원·구광모 같은 3·4세대 세습의 독점자본가들이 자리잡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노동시장 하층에 대한 착취 문제를 이야기하려면 이재용·정의선·최태원·구광모 같은 독점자본가들의 착취적 기능과 약탈적 역할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대기업·정규직 노조의 행태를 살펴도 늦지 않다. 왜냐하면 전자는 원인이며 후자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동일한 문제는 계속해 발생한다.

박 선임연구위원에 따르면, 독일식 직무급은 “기본적으로 직무급적 속성과 연공급적 속성을 동시에” 지닌다. “직무급과 연공급 문제를 하나는 취하고 다른 하나는 버리는 식으로 사고하지 않고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독일식 직무급 작동의 또 다른 기반은 노동시장 진입자들이라 할 수 있는 직업훈련생 제도가 이러한 산별 임금체계의 기초 지반을 형성해 주고 있는 점”이다. 노동시장의 출발점부터 “산업별 노사의 교섭에 의해 훈련생들의 처우를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직업훈련제도는 노사정 협의에 기반해 공적 제도로 운영되는데, 이는 직업훈련에서 노동조합을 배제하고 그 기능과 역할을 사기업과 시장에 방임해 버린 한국과 대비된다.

박 선임연구위원은 발표문에서 독일식 직무급의 사례로 환경미화직, 건물청소직, 대중교통운전직, 육아돌봄직, 노인·장애인돌봄직 같은 취약 노동자 직종을 위한 임금협약들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1차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2차 노동시장의 취약노동자를 보호하려는 기능을 가진 독일식 직무급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정반대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취약노동자임에도 노조의 보호를 상대적으로 잘 받아 온 건설노동자와 화물트럭 운전자를 위한 협약과 합의를 깔아뭉개는 정부의 행태는 윤석열 정권의 의도가 2차 노동시장 종사자에 대한 보호에 있지 않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층 노동시장 대책 마련에는 눈감고 상층 노동시장에 대한 약탈에만 집착하는 윤석열 정권의 행태는 노동조합운동을 파괴하려는 본인들의 의도와 달리 한국의 노동시장만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곧 다가올 노동시장 파멸의 날에 윤석열 정권과 독점자본가에 복무한 어용 지식인들이 어떤 변명을 늘어놓을지 두고 볼 일이다.

윤효원 객원기자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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