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다혜 변호사(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지하철을 이용할 때마다 꺼림직하게 떠올리는 사건이 있다. 수년 전 서울지하철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폐암 발병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해요인으로 지목된 라돈을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정부는 역학조사 등을 통해 지하공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라돈으로 인한 건강장해가 발생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당시 환경부는 노동자들이 업무를 수행하는 지하공간은 작업환경이기 때문에 고용노동부 소관이라고 하고 노동부는 실내공기질 관리는 환경부 업무라면서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에서 확인되는 초고농도 라돈은 터널·승강장·역사 등의 농도에 영향을 미친다. 라돈 같은 발암물질은 역치의 개념이 없고 노출에 비례해 암 발생 위험도가 높아진다. 노동조합의 파업이나 장애인단체의 이동권 투쟁이 시민들의 발을 묶는다며 노동자와 장애인을 비시민으로 명명하는 정부나 지자체·지하철공사가 매일 발암물질에 노출되는 시민들의 일상에는 얼마나 느긋한지 아이러니하다. 안타깝게도 상시적인 모니터링 체계와 정보 공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저감 대책에 대한 요구가 여전히 유효한 현실에서 이것이 지하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만의 문제라고 볼 수 있을까.

이뿐 아니다. 최근 광주 학동과 화정동 공사장에서 아파트가 붕괴했을 때 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뿐 아니라 많은 시민이 죽고 다쳤다. 사실 조금만 둘러봐도 공사장의 위험이 시민의 일상에 영향을 주는 사고가 숱하게 발생해 왔음을 알 수 있다. 2017년 서울 강서구에서도 버스에 타고 있던 시민이 정류장 옆 공사장에서 쓰러진 크레인에 깔려 사망했다. 실제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하거나 산재은폐 등을 한 사업장을 집계했을 때 절반 이상이 건설사일 정도로 건설현장은 대표적인 위험한 일터다. 공사장 사고는 특별한 뉴스조차 되지 않는 사회에서 출근길에 마주치는 집 근처 공사현장을, 그곳에 우뚝 선 크레인을 불안한 마음으로 주시하면서 길을 걷는 것이 지나친 염려라 할 수 없다.

신당역에서 동료 여성노동자를 살인한 사건이 일어난 지하철역 화장실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공공장소였다. 공격을 당한 피해자의 즉각적인 대응과 주변 시민들의 조치가 없었다면 지나가는 다른 시민이 추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 많은 노동자의 일터인 공공장소에서 그들이 경험하는 위험이 우리의 것이 아닐 리 없다. 비단 그날 그 화장실만의 일은 아니기에 최소한의 조치로서 인력충원 필요성이 계속 제기되지만, 오히려 정반대 방침이 고수되고 있다. 또한 철도 안전을 위해 안전인력 등 정원을 늘려야 한다는 연구용역 결과를 정부가 무시하면서 오히려 ‘공공기관 혁신’ 따위를 위해 인력감축을 강요하고 있다는 요즘의 뉴스는 철도를 일터로 삼은 이들에게는 물론이고 일상의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시민들에게도 중요한 사안이다. 자주 멈추고 심지어 탈선하는 열차 사고 소식에 불안했던 경험이 어디 나만의 경험이겠는가.

화학물질 누출로 중독·질식 등 피해를 겪는 노동자들의 문제, 화학물질이 공장의 담을 넘어 공기 중으로, 토양으로, 하수로 흘러갈 때 이를 마시고 접하는 지역사회 모두의 문제가 된다. 근처에 들어선 공장들 때문에 어쩌다 암(癌)세권, 병(病)세권이라고 불리게 된 시골 마을들의 사정은 전국 곳곳에서 닮은 듯 확인된다. 일터에서의 노동시간이 날마다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도 매우 중요하다. 장시간 노동을 극대화하는 ‘미래노동시장연구회’ 권고에 노동자는 급히 귀가해 부족한 수면을 취하도록 해 주면 얼마든지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기계가 아니라, 함께하는 인간관계가 있고 일상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과 집을 돌봐야 한다는 여성단체의 일갈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면서도 귀한 지적이다.

이렇듯 일상의 삶으로 번지지 않고 일터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음에도 지금 우리 사회는 마치 노동자의 삶과 시민의 삶이 따로 있는 것처럼 인식하고 말하는 듯하다. 노동자의 일터가 위험하고 해로운데 그와 무관하게 시민의 일상이 안전하고 건강할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 노동자의 안전과 보건에 관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건설안전특별법, 산업안전보건법, 노동시간을 비롯한 노동조건, 일터에서의 관계 등을 정하고 있는 근로기준법,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등의 법과 제도, 이를 둘러싼 투쟁과 논의가 노동의 세계에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이라도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이 모두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말해 왔는지 진지하게 돌아봤으면 한다. 화물연대와 많은 화물운송 노동자들이 요구하고 있는 안전운임제가 단순히 해당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의 안전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도로 위 모두를 위한 조치라는 것이 지난 파업과 투쟁을 통해 계속 얘기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평등한 조직문화를 고민하는 어느 교육에서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노동환경이다”고 배운 적이 있다. 구성원 모두의 몫으로 만들어진 조직문화가 우리 스스로, 또 서로의 노동환경이 된다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일터는 우리 모두의 삶의 공간이다. 미래세대를 비롯한 인류에게 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원전을 두고 “안전을 중시하는 관료적인 사고는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정부의 수장인 시절에 살고 있지만, 그가 틀렸다는 것을 아는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시민과 생의 이해관계를 공유한다. 당신의 일터는 나의 삶터라는 연대의 감각이 선명할 때 노동과 노동, 노동자와 노동자, 노동자와 시민을 갈라치기 하려는 시도에 맞서 우리 모두의 안녕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