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현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

2022년 6월23일 윤석열 정부의 신임 고용노동부 장관은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 브리핑을 진행했다. 기자들을 모아 놓고 1시간 넘게 브리핑과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우선 추진과제로 근로시간 제도 및 임금체계 개편을 이야기했고, 추가 개혁과제로 노동법 사각지대 해소, 산업전환에 따른 원활한 이·전직 지원, 양극화 완화 등을 노사정·전문가와 사회적 대화, 충분한 논의과정을 거쳐서 추진하겠다고 했다. 근로시간 제도는 노사 자율을 빌미로 연장근로시간 관리 단위를 ‘주’에서 ‘월 단위’로 늘리고 근로시간 저축계좌제 도입,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기간 확대 등 유연근로제를 강화하겠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임금체계는 과도한 연공성을 줄이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총노동시간을 줄이고 노동자들의 건강을 보호하겠다면서도 해법은 제시되지 않았고, 연공성의 문제에 앞서 괜찮은 일자리(decent work) 문제는 외면했다. 기업측의 입장만을 대변한 장관의 브리핑은 다음 날 대통령 도어스테핑의 질문거리가 됐고, 보고도 받지 못했다는 대통령의 발언이 논란이 됐다. 장관 언론 브리핑의 공식적 무게감은 떨어졌다. 의도했든 아니든 정부의 엇박자로 지난 7월18일 각계 전문가 12인을 위원으로 구성된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마치 노동시장 개혁 구상의 구심이라도 되는 듯한 존재가 됐다.

그 연구회가 지난 12일, 5개월도 안 되는 활동을 마무리하며 권고를 내놓았다. “공정한 노동시장, 자유롭고 건강한 노동을 위하여”라는 유려한 제목을 달았지만 권고 내용은 연구회 전문가 몇몇의 이름값에 실린 일말의 기대감조차 지웠다.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권고에서 ‘미래’는 오로지 기업들의 앞길이었고, ‘노동’은 노동자와 분리돼 멋대로 재단당했고, ‘연구’로부터 도출된 새로운 제안이나 시도도 보이지 않았다. 미래도 노동도 연구도 없이 오로지 ‘시장’만이 남아 있었다. 시장 지배자들의 소원수리를 전문가들의 이름을 빌려 알차게도 담았다. 번복 아닌 유예를 거쳐 지난 6월 브리핑했던 정부의 개혁안이 다시 발표된 것이나 마찬가지의 내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권고 발표가 있자마자 노동부 장관은 “전문가들의 진단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속 가능한 미래 지향적 노사관계, 노동시장을 위한 개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며 완수 의지를 밝혔다.

전문가들이 나서야 한다. “각자의 소신과 철학, 전문성에 기반해 독립적으로 활동했다”는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권고는 어떤 균형감도 없이 기업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기득권 유지와 개혁 비용 배분을 둘러싼 담합과 갈등’으로 표현되는 ‘노동개혁’ 실패에 대한 책임을 오로지 노동자들에게 묻고 있고, 기업이 감당해야 할 것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제시되고 있지 않다.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는 노동유연화, 임금체계 개편안을 던져 놓고 당장 입법적·행정적 조치를 요구한다. 그런 한편으로는 1. 격차 해소를 위한 법·제도 개선, 2. 미래지향적 노동법제 마련, 3. 자율과 책임의 노사관계 구축을 위한 법·제도 개선, 4. 노동시장 활력 제고를 위한 고용정책 강화 등 추가과제는 앞으로 사회적 논의로 추진하라고 충고한다. 발주자의 노골적인 의도에 충실하면서도 벼룩의 낯짝만큼의 면피를 원했는지 모르나 이런 본말전도가 없다. 전문가들은 최소한 2019년 탄력근로제 확대 시도 때 나섰던 만큼이라도 역할을 해야 한다. 전문가들이라면 추가과제로 던져진 의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해결 전망이 빠진 채로 노동시간과 임금체계 개혁이란 가능할 리가 없다는 것을, 노동시간이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다가 결국 장시간 노동으로 귀결돼 무너질 노동자들의 건강과 안위를 이야기해야 한다. 전문가들이 국정과제에 철학과 지조 없는 들러리 역할을 하는 것에 경종을 울리는 것도 전문가들 몫이다.

미래노동시장연구회에 입법적·행정적 조치를 호령할 권한은 누가 주었는가? 준비된 수순으로 연구회를 구성한 정부로서야 장관이 “온 힘을 다해 기필코 완수”할 행정적 조치를 흔쾌히 마련할 수 있겠지만, 입법적 조치를 주문받은 정치권은 배알도 없는 모양이다. 애당초 연구가 아니라 정치가 작동했어야 할 일이다. 아무리 우리 사회의 정치가 맹탕이라고 할지언정 노동시간과 임금이라는 거대한 헤게모니를 법적 근거나 대표성도 모호한 전문가들의 연구모임에 내맡겨 둔 것부터가 문제다. 뒤늦었지만 의회정치건 진보정치건 체면을 구긴 정치가 역할을 해야 할 시간이다. 고작 5개월간 연구라기보다는 형식적 편력에 기반한 권고를 내놓고는 입법에 조속히 착수하라는 이들의 가당찮은 호언에도 응수하지 못할 것이라면 오호 통재라, 정치는 진짜 폭싹 망해 버린 것이다. 팔뚝질로 시작하는 거리의 정치든 테이블에 정좌하고 정부와 의회를 압박하는 협상의 정치든 제대로 대거리를 못 한다면 노동의 정치도 마찬가지다. 노동시간과 임금체계라는 핵심 의제를 언제까지나 정부안을 기다렸다가 맞대응하는 방식으로 다룰 수는 없는 일이다. 꼼수는 정수로 받으라 했다. 시간을 들여 진짜 연구와 사회적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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